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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성인 축일

3월 24일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

by 하늘 호수 2007. 6. 13.

 

 

축일:3월 24일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

St. CATHERINE of Sweden

St. Catherine a Suecia, V

Catherine of Vadstena, Bridg. V (RM)

Santa Caterina di Svezia Religiosa

1331 at Sweden -

24 March 1381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484 (cult confirm!ed) by Pope Innocent VIII

Caterina=donna pura, dal greco=pure woman, from the Greek

 

 

 

가타리나는 ’순수한’이란 뜻이다.

성녀 브리지따의 8명의 자녀 가운데 4째인 가타리나 울프스도터는 스웨덴의 울파사에서 태어나,

14세 때 에가르트 폰큐르넨과 결혼하였으나,자신은 정결 서원을 하겠노라는 뜻을 남편에게 확신시켰다고 한다.

1350년, 그녀는 로마에 있는 어머니(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축일:7월23일)를 방문하였다가,

어머니로부터 설득당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예언한대로, 가타리나는 그 해에 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타리나는 25년 동안을 어머니의 항구한 동반자로 활동하였다.

브리지따가 운명하자, 그녀는 스웨덴의 받스테나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건강이 나빴으므로,

늘 고생하다가 1484년 3월 24일에 운명하였다.

인노체시오 8세 교황은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5기도]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축일:7월23일

*잉글랜드의 성녀 브리지다(비르지다)축일:2월1일

 

 

 

Saint BRIDGET of Sweden

축일:7월23일.스웨덴의 성녀 브리지타

 

 

한 마디로 선(善)이라 함은 하느님의 명령을 완수한 ’선’도 있는가 하면, 그의 권고를 따른 ’선’도 있다.

명령의 경우에는 이를 게을리 하면 죄가 되지만,

권고의 경우에은 순종하지 않아도 별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특별한 공로를 세우게 된다.

지금 말하려는 가타리나 성녀도 이와같은 특별한 공로를 세운 분이었다.

 

그는 성녀 비르지타(축일:7월23일)의 넷째 딸로서 1331년 북유럽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특별한 생각 끝에 7세에 이미 집을 떠나 리세베르그의 수도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뒤 가타리나는 그 수도원에 입회해 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했지만

그런 일도 모르는 아버지는 독단으로 그녀를 에카르트 폰큐르넨과 결혼시킬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가타리나는 아버지에게 수녀원에 입회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아버지는 만사를 제쳐놓고 결혼하라고 했다.

가타리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었고, 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동정을 보호해 주시리라 확신한 끝에 아버지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결혼한 가타리나는 남편에게 자기가 동정서원한 사실을 말하며 양해를 구하자

남편도 처음은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다행히 그 역시

신앙이 두터웠던 사람이었으므로 가타리나의 원을 들어 명색은 부부이면서도 사실은

남매처럼 정결을 지키면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덕행의 길을 걸었다.

가타리나의 전기를 저술한 울포 수사는 이 고결한 부부에 대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정원에 나란히 자란 두 백합같이 아름다운 정결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들이 결혼한 후 얼마 안 되어 가타리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하느님의 성소를 받아 로마에 가게 되었다.

이 구원의 성도(聖都)는 가타리나에게 있어서도 전부터 동경해 오던 땅이었고

특히 어머니가 그곳으로 떠난 후 부터는 한층 더 그곳에 순례하고 싶은 생각이 열렬해져

마침내 병까지 걸리게 되었다.

남편 에카르트는 이를 대단히 걱정하며 여러 모로 이유를 물어 가타리나가 설명하니

남편은 기쁘게 로마 순례를 허락해 주었다.

 

가타리나는 동료 세 명을 데리고 먼 여행을 떠났다.

당시는 교통 수단이 없었으므로 18세의 젊은 여성에게는 위험도 매우 많았으나

무사히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타리나는 즉시 어머니의 거처를 찾았으나 쉽게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8일간 사방을 헤맨 결과 로마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수녀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그녀는 어머니의 안내를 받으며 소원이었던 로마의 여러 성지를 반복해 순례한 후

귀국하려고 할 때 뜻밖에 남편의 부고를 받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던 가타리나는 일시 비탄에 잠겼으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남편이 떠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병자를 방문하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간호하며 선종을 준비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순례하기를 즐기던 가타리나는 그 후에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로마의 여러 성당을 참배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황은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 가 로마는 극히 풍기가 문란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직 젊은 딸을 염려하고 혼자 길 걷는 것을 금했다.

처음에 가타리나는 그것이 불만스러워 견딜 수 없었으나 하느님의 빛을 받은 다음에는

순례하는 것 보다 어머니에게 순명하는 것이 더 하느님의 뜻에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가타리나는 성모 소일과와 피정과 묵상 들을 즐기며 특히 주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에는

몇 시간씩 걸린 때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172년 가타리나는 어머니와 함께 성지 팔레스티나를 순례하는 도중 어머니는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가지고 스웨덴에 돌아와 전에 어머니가 세운 바드스테나 수녀원에 묻고,

자신도 그 수녀원의 수녀가 되어 많은 자매들에게 말과 행실로서 모범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1381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은 그녀을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십자가 지고 가시는(Guitar)-가톨릭성가12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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