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실의
(마테오리치 지음)
천주실의 초판의 서문 - 풍응경(1555-1606)
*천주실의는 대서방국 이마두(마테오 리치) 및 그의 수도회원들이 우리 중국인들과 문답한 글이다.
천주란 무엇인가? ‘하느님(上帝)이다.
실(實)이라 함은 공허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육경과 사서에서 여러 성현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하느님을 도우라!, 하느님을 받들라!, 하느님과 교감하라!”고 말하였다.
*누가 하느님을 공허한 것이라 하겠는가?
공허한 이론은, 한나라 명제때에 인도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쓸데없는 일을 좋아하는 이들은 “공자가 일찍이 언급한 서방의 성인은 아마도 부처님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불교의 이론이 우리 나라 육경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하며 불교의 이치를 서로 고위 선동하고 있다.
*이들은 인도는 중국의 서쪽이지만 서방대국 또한 인도의 서쪽임을 어찌 알았겠는가?
불교는 서쪽으로 피타고라스의 이론을 훔쳐서 우매한 세속인들의 말을 현혹시켜서 윤회설을 늘어놓았다.
*중국으로부터는 노자의 “만물을 풀강아지로 보는 이론”을 훔쳐 내어, 그것을 부연하여 만물의 진상이 적멸(아무것도 없이 고요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하찮은 티끌이나 풀잎이나 무지하게 큰 육합(하늘과 땅과 사방)-에서 단지 초탈하고자 하는 것만을 고상하다고 여긴다.
*중국에서 성인의 자취는 멀어지고 그 말씀도 없어지니 불가의 마음을 극복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가 거의 없다.
또한 어떤 이는 마음 속으로 불교의 한가로운 여유와 마음의 허정(虛靜)의 이로움을 즐기며, 밖으로는 규범에서 벗어나 멋대로 마음대로 하는 기벽을 사모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명리를 뒤쫓는 고생에 염증을 느끼는 것이요, 후자의 경우는 육도의 윤회에 떨어지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극도로 지치게 되면 하느님(天)을 외쳐 대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처님을 부른다!
옛날에는 하늘과 땅, 토지신과 곡식신, 산천의 귀신과 조상의 신묘에게 제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부처에게 제사드린다!
옛날의 선비들은 ’하늘‘을 알고 ’하늘‘에 순명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염불을 하고 불상을 만든다!
옛날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삼가 공경하고 믿음으로 받들었다. 그들은 감히 스스로 한가롭게 즐기면서 하늘의 백성들을 못 되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조정에 숨어 있거나 선문(禪門)으로 도피하여 세상을 떠나 있다.
*부처는 인도의 임금이면서 스승이다. 우리 나라 스스로도 임금이면서 스승인 사람이 있다.
먼 옛날의 삼황, 오제, 삼왕, 주공, 공자 및 우리나라, 즉 명조의 태조 이래로 모두가 그러하다.
저들의 임금 스승(부처)이 하늘을 모욕하고 그 위에 올라타고서 말하는 셈이다.
우리 나라의 임금 스승은 하늘을 이어서 하늘 아래에 법도를 세우셨다.
저들 나라가 이것을 따른다면 책망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배운 것을 버리고 저들을 따른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정자 선생님이 말하였다.
“유교는 하늘에 바탕을 두고, 불교는 마음에 바탕을 둔다.”
마음을 본받는 것과 하늘을 본받는 것은 ’내가 있다(有我)와 ‘내가 없다(無我)’ 구별과 같은 것이다. 이 두 주장이 다 사람의 도덕적 의지를 규정하기에 충분하겠다!
*이 책 천주실의는 우리나라 육경의 말들을 두루 인용하여서 그 ‘사실됨(實’)을 증명하고 불교나 도교에서 ‘헛됨(空)을 노하는 잘못을 깊이 있게 비판하고 있다.
서방(서양)으로 서쪽(인도)을 공격하고, ’중도로써 ‘중국의 도리’를 교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인륜을 버리고, 할 일을 그대로 놓아 두면서, 매사에 집착하지도 물들지도 말라고 너절하게 말하며 요점은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라 하니, 윤회의 이론이라는 것이 허탄함은 매우 명백하다.
불교는 개인의 일을 도모하는 데 지혜와 힘을 다하는 것이고 자기 몸 밖의 일에는 경계선을 그어서 나눈다. 요컨대 자기 어버이만을 오로지 어버이로 받들고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대하려는 것이다.
*이에 이 책 천주실의에 의하면 하늘의 아버지는 매우 공정하고 또한 명백하시다. 사람의 본성은 금수들과 크게 다름을 놓하고 있다. 학문은 인을 행함에 귀결되니, 사욕을 버림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때로 어떤 것은 우리 나라에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론이고, 일찍이 들어는 보았으나 힘쓰지 못한 것이 열 중에 아홉이나 된다.
*리치 선생은 8만리를 주유하며 위로 우주, 그리고 가장 깊은 바닷물을 측정하였으나 모두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을 일단 다 헤아려서 확실한 증거를 대었다. 그렇다면 그의 신묘한 이치는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며 속임이 없다.
우리 중국인들은 생각은 가졌어도 논술하지 못하고 논술해도 논변하지 못한다. 일찍이 이해했으나 실천에 힘쓰지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각성하여 깨닫고 숙연히 반성하여 근실하게 다시 실천해 볼 마음이 나지 않겠는가!
*못난 나는 이제 만년이 되었고 이 지역(중국)도 다 다니지 못했으니 식견은 하늘을 우문만하게 도는 개구리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공리공담의 유폐를 목격하고 무릇 사람들이 실질을 말함을 즐거워하노니, 삼가 그 실마리를 적어서 명백히 통달한 이(리치)와 함께 참뜻을 찾고자 한다!
1601년 3월 좋은 날
후학 풍응경(馮㒣京), 삼가 서문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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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재판의 서문 - 이지조(1565-1630)
*옛날 우리의 공자님은 수신을 말하였다. 먼저 어버이를 섬기고 미루어 나가서 하늘(天)을 아는 것이다.
맹자의 도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하늘을 섬긴다는 논의에 잉르럴 이 뜻이 크게 갖추어졌다.
앎에 있어서나 일을 함에 있어서나, 하늘 섬김과 부모 섬김은 같은 한 가지 일이니, 하늘은 이런 섬김들의 대근원이다.
*하늘을 말한 것으로 주역보다 잘 말해지니 곳이 없다. 주역은 문자의 시조가 되며, 주역의 첫 괘에 나오는 건원은 하늘을 통괄하니 곧 임금이요 아버지가 됨을 말하였다.
또한 “‘하느님’(帝)은 천둥에서 나왔다.“고 말하니 주희는 이를 해석하여 하느님이란 하늘을 주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렇다면 천주의 뜻은 이(마테오 리치)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리라!
‘하늘’의 뜻은 까마득히 먼 것이어서 그런 것까지 논의할 시간은 없다고 세속인들은 말한다.
*석가모니가 나오고부터 자기의 어버이를 섬기지 않는 것이 또한 이미 심히 고약하거늘, 아득히 먼 천제를 망령되이 지어 내어서 스스로를 존자로 여기고 있다.
유림 중에도 그것을 받아들인 이들은 천명이니, 천리이니, 천도이니 천덕이니 하는 말들을 익숙하게 듣다 보니, 또한 불교에 잘못 빠져 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무리들이 천주를 알지 못하여 경외하지 않는 것 또한 이상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테오 리치 선생은 한결같이 하늘을 모시는 것을 본으로 삼고 ‘하늘’이 ‘하늘’이 되는 이유를 매우 명백하게 논하였다.
그리고 세속에서 ‘하늘’을 업신여기고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을 보고서 언론을 펼쳐서 그들을 배격하였다.
이에 스승의 학설을 근본으로 본받아서 천주실의 열 편을 지어내어 선(善)을 훈설하고 악행을 막고자 함이었다.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 섬길 줄은 알지만 천주가 대부모(大父母)임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라에 정통이 있음을 알지만 오직 하느님만이 하늘을 통괄하는 대정통임을 알지 못한다.
부모를 섬기지 않으면 자식이 될 수 없다. 누가 정통인지를 모르면 신하가 될 수 없다. 천주를 섬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악에 대한 논의 및 복과 재앙에 대한 보응을 더욱 진솔하고 주도하게 논하였다.
모든 선이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순선(純善)이라 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이라도 본성에 누가 되면 또한 악이 됨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오르는 것이니, 복된 천당에 오르는 것이다. 악을 짓는 것은 떨어져 내리는 것이니, 컴컴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데로 나아가게 하고 사욕을 막고 인(仁)을 온전하게 함이다.
근본의 시작을 성찰하고서 하느님께서 내려와 살피심을 두려워하면서, 끊임없이 돌이켜보고 두려워하면서 서둘러 죄르르 씻어 낸다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거의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서양인들이 항해하여 와서 예물을 갖추어 교류하는 것으로 말하면, 예부터 중국과 서로 소통할 수가 없었기에, 우리 중국에 이른바 복희, 문왕, 주공, 공자의 가르침이 있음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마테오 리치의 학설 또한 일찍이 우리 중국의 주돈이, 정호/정이, 장재와 주희의 해석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하늘을 알고’, ‘하늘을 섬긴다’는 큰 뜻은, 바로 유교 경전에 근거한 바와, 신표의 두 쪽처럼 꼭 합치한다.
속 좁은 사람은 천당, 지옥의 개념들만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한 것에 복 주고 악한 것에 화를 내린다는 요점은 유자들도 늘 말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살피는 것 또한 그 자체 ‘실제적인 이치’ 實理인 것이다.
*선을 버리고 악을 좇는 것을, 대도시(세속의 번뇌)가 싫다고 해서 높은 산으로 들어가거나 뗏목을 타고 큰 바다로 떠나는 것에 대비하면,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임금이나 부친의 위급한 일에도 달려가지 않고 충성이나 효도의 큰 도리에도 관심이 없다면, 아마 이들에게 누가 호랑이나 늑대, 큰 뱀이나 악어의 위험을 알린다고 해도 그 말을 믿고서 달려나와 반드시 자기 몸을 던져서 남을 구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또한 정말 매우 우직하고 못난이들이 아니겠는가!
*그네들의 마음속에 있는 둘일 수 없는, 원래 마음의 본바탕에서 나온 실학은 하늘이 화와 복을 내리심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을 벌하고 게으른 자를 경계하려면 천명으로 성토하고 그들의 마음을 억제하거나 발양해야 한다.
이런 뜻과 합치하여 그것을 온존시켜서 속인들을 훈계하는 가르침을 세워야 한다.
*진실로 고심을 하며 이 리치의 책을 일찍이 읽어 보니, 그 뜻이 종종 근세의 유학자(성리학자)들과 같지 않으나, 중국의 상고 시대의 자연과학적 고전들: 소문, 주비, 고공, 칠원 편 등과 소리 없이 서로 통하니, 도리어 순수하여 올바름에 거짓이 없다.
리치 선생은 자신을 단속하고 마음을 섬김에 엄격하여 조금도 나태하지 않으니 세상의 높으신 학자라도 그보다 앞섰다고 볼 수 없다!
진시로 동양과 서양은 마음도 같고 이치도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은 다만 언어 문자뿐이다.
이 책이 출판되면 같은 문자로 교화하는 것이다.
*또한 내 자신이 선발대가 되어서 아름답고 밝은 것을 고취하며 가르침을 돕고 속인들을 분발시키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어찌 거저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마땅히 유교 사상과 다른 제자백가의 이단 사상들과 같은 부류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로다!
*나의 벗 왕맹박씨가 항주에서 재판을 하니 내가 주제 넘게 몇 마디 머리말을 적는 것은 이 방인의 책을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했던 점은 그것을 듣고서, 진실로 그것을 하늘로 받고 그 요점을 흠숭하는 것이고, 혹 익히 알고 있는 것이나 힘쓰지 못했던 것은 이 기회에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도심을 온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배우에 마땅히 도움이 되는 바 없지 않을 것이로다!
1607년, 태양이 심(心)별의 자리에 있는 날
서쪽 절강성의 후학
이지조(李之藻)가 손을 닦으며 삼가 서문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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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의 서문 -마테오 리치 (1552-1610)
온 천하를 화평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상의 도리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함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자와 성인들은 신하들에게 충성스런 마음을 권하였습니다. 충성은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오륜은 군주에 관한 것을 첫째로 삼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삼강중에서 으뜸입니다. 무릇 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은 그 점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옛날에 사회가 혼란하여 여러 영웅들이 나누어져 전쟁을 하고 있어서 아직 진정한 군주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은 정통성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깊이 살펴서 오직 몸을 바쳐 그를 위해 순절하였고, 혹시라도 충성스런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라에도 주인이 있는데, 천지에 유독 주인이 없겠습니까? 나라가 하나의 군주에 통섭되는데, 어찌 천지에 두 주인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군자라면, 우주의 근본이요, 창조와 생성의 으뜸을 반드시 잘 인식하여 앙모하고 사색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타락하며 천명을 거역하는 못된 자들이 있어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있습니다.
재주를 부려서 이 세상의 온갖 영화와 권세를 탈취해도 오히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주의 자리까지 넘보려 하여 인간의 자리를 뛰어넘어가 그 천주의 존위 위에 군림하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늘만은 높아서 사다리를 타고도 올라갈 수 없으니, 천주의 자리를 가로채려는 인간의 욕망은 이루어지지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을 참칭하는 저 못된 인간들은 사악한 이론을 그릇되게 퍼뜨리고 약한 백성들을 기만하고 오도해서 천주의 자취를 지워 버리고 있습니다.
저들 사악한 인간은 망령되이 사람들에게 물적 이득과 행복을 약속해 주고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흠숭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저들 천주를 참칭하는 사악한 인간이나 이들 오도되어 사악한 인간을 천주로 받드는 어리석은 사람 모두가 천주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어, 세세 대대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 까닭을 생각해 보는 이는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찌 천주를 참칭하는 도둑을 주인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은 나타나지 않고, 못된 무리들이 서로 부채질하며 날뛰고 있으니 참되고 성실한 도리는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온 세상을 널리 유람하였으며, 이런 천주 모독의 지독한 폐해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중국이란 요순의 백성들이요, 주공과 중니 곧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민족이니, 천리(천주에 대한 이치)와 천학(천주에 관한 학문)은 결코 달리 고쳐져서 이단으로 오염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간간이 오염된 바 있다고 생각되어, 저는 마음 속으로 그에 대한 논증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저는 먼 나라에서 온 외로운 나그네이므로 저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과 달라서 입을 통해서나 손가락을 움직여서는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재질은 못났기에, 분명하게 하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용이 혼미해질까 두렵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개탄하는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20여 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읍소하며 기도했습니다.
천주께서 이 살아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어,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해 왔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두어 친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제가 중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를지라도, 두둑을 보고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정말 안 되니 혹시 인자하고 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가 그 외침을 듣고서 분연히 일어나 그 도둑을 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제가, 중국 선비들이 우리 천주교 신부들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구술로 답한 것이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된 것입니다.
아아! 어리석은 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장님이 하늘을 보지 못하여 하늘에 태양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햇빛은 실재하는데 눈이 스스로 볼 수 없을 뿐이지, 어찌 태양이 없지난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주의 도리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또한 살피려고 하지 않아서 하늘이 주재함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형상은 없지만, 완벽한 눈이어서 보지 못하는 바가 없고, 완벽한 귀여서 듣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완벽한 발이어서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하늘의 주재함은 착한 자식에게는 부모님의 인자한 은덕과 같으나, 못난 자식에게는 재판관의 엄혹한 위엄과 같습니다.
무릇 선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최고의 존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만약 이런 존자가 없거나 혹은 존재해도 인간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무신론이나 헛된 생각은 선을 실천하는 방도를 막아 버리고 악을 저지르는 길을 크게 열어 놓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천둥 벽력이 단지 고목만을 치고 곧바로 불인(不仁)한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위에 주님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이는 천주가 죄를 벌하는 것은 엉성한 것 같으나 놓치는 일이 없으니, 늦어지면 그만큼 벌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들이 이런 ‘최고의 존자’를 흠숭하는 것은 분향 드리고 제사 지낼 때만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이 되는 아버지’이시며, 조화시키는 큰 공능을 항상 생각하면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은 그분이 반드시 지극한 지혜로써 이 세상을 경영하고, 지극한 능력으로 이 세상을 완성시키고 있으며, 지선으로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을 갖추어 주고, 개개 사물과 만류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모두 결함 없이 해 주심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대륜(大倫)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주의 이치는 은밀하여 분명히 밝히기 어렵고, 범위가 넓고 넓어서 다 알기가 어려우며, 안다 해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배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천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해도, 이 적음의 이로움은 오히려 다른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 천주실의를 읽는 이들이 문장이 미미하다고 해서 천주의 뜻을 미미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천지도 천주를 다 실을 수 없거늘, 이 작은 책이 어찌 다 실을 수 있겠습니까?
1603년, 7월 보름의 다음날 (7월 16일)
마테오 리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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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편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주재하여 안양하심을 논함
제2편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풀이
제3편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여 동물의 각혼과 크게 다름을 논함
제4편 귀신 및 사람의 혼에 관한 이론을 분석하고, 천하 만물은 한 몸(一體)이라고 말 할 수 없음을 풀이함
제5편 윤회의 여섯 방도와 살생을 금하는 오류를 논박하며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을 올리는 바른 뜻을 논함
제6편 의지는 소멸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아울러 사후에 반드시 천당과 지옥의 상벌 로써 세인들이 행한 선악에 응보가 있음을 논함
제7편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배움을 서술함
제8편 서양 풍속이 숭상하는 바를 일괄하여 말하고, 서양의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까닭의 의미를 논하며, 아울러 천주께서 서양에 강생하신 이유를 해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