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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성인 축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by 하늘 호수 2008. 12. 14.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 - 포르치운쿨라 성당

 

축일: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t. FRANCIS of Assisi
Sankta Francisko
Solemnity of Saint Francis of Assisi
San Francesco d'Assisi Patrono d'Italia
(Assisi, 1182 - Assisi, la sera del 3 ottobre 1226 )
Born:1181 at Assisi, Umbria, Italy as Francis Bernardone
Died :4 October 1226 at Portiuncula, Italy
Canonized :16 July 1228 by Pope Gregory IX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10월 4일은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 귀천하신 날이기에

10월 달력에 포르치운쿨라 대성당에 그려져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 모습을 넣었습니다.

첼라노는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중병으로 쇠잔하여 모진 고통을 당하며 죽음에까지 다다르자, 그는 자신을 알몸으로 맨땅에 눕히게 하였다...

그렇게 땅바닥에 뉘어진 채 그는 거칠은 옷을 벗고

습관대로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 그의 온 신경을 하늘의 영광에 쏟으며,

그는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를 왼손으로 감싸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이 할 일을 가르쳐 주시기를 빕니다.’”

(첼라노 제 2생애 216항).

“형제들이 오열하였고, 위로할 길 없는 신음에 빠져 있는 동안에,

거룩하신 사부님은 그에게 빵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가 강복을 하고 빵을 떼어 작은 조각들을 각 형제들에게 먹으라고 나누어 주었다.

복음서도 가지고 오게 하여 요한복음을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으로 거행하신 지극히 거룩한 만찬을 경건히 되새기며

자기 형제들에게 지니고 있던 깊은 사랑을 보였다.

그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며칠 동안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동료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를 찬미하자고 가르치며 찬미로 보냈다.

 

그가 온 힘을 다하여 다음 시편을 노래하였다:

‘목소리 높히어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유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였고,

전에 그가 지은 노래를 빌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그들을 열심히 일깨웠다.

 

그는 누구에게나 소름끼치는 일이고 저주스럽기만한 일인 죽음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 안에 죽음이 머물도록 초대하였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첼라노 제 2생애 217항).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보다

자기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을

더 많이 자랑하지 않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권고17)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유언(1-5)

 

1) 주님이 나 프란치스꼬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2)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3)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4) 그리고 주님이 성당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5)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써 세상을 구속하셨사오니,

우리는 여기와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THE SAN DAMIANO CROSS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프란치스꼬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시기였고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황금기인 시대였다.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풍미한 그리스도관은 부활,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꼬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박히셨던 그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관은 교회와 모든 크리스챤에게 회개를 거듭 요청하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를 청빈과 겸손으로 그리스도와 같아지게 하신 하느님,

저희도 그의 길을 따라 성자를 닮으며 진정한 사랑으로 당신과 결합되게 하소서.

 

 

 

 

하느님의 인간의 사랑에 대한 크나큰 사랑에 감동되어 우시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첼라노 제 2생애 196항).

첼라노는 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와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 숨으로 채웠고, 어떤 위로도 마다하였다.

절친한 친구 하나를 만나 그에게 자기가 슬퍼하는 이유를 알리자,

이내 그의 친구도 비참한 마음이 들어 눈을 글썽였다.”(첼라노 2생애 11항).

이 그림은 그렉치오 성당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권고5)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 GIOTTO di Bondone

1300.Tempera on wood, 314 x 162 cm.Musee du Louvre, Paris

 

1224년 9월 프란치스꼬는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像)이 된 그는,

몸이 몹시 불편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공경과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1226년 봄 그가 시에나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마지막 바람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쓰게 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서는 사랑을, 가난 부인에게는 충실을,

교회의 고위 장상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존경과 순종을 실천하라고 역설하며 그들을 축복했다.

 

성인의 원의에 따라 형제들이 프란치스꼬를 형제회의 요람이라 할 뽀르찌운꿀라로 모셔갔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가 내용을 보충한 마지막 유언을 받아쓰게 했고,

그 본문은 타인의 문학적 수정 없이 프란치스꼬의 언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감사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홀로 형제회를 창설하셨다는 확인이었다.

그는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하였고,

모든 형제들이 어떤 일에든 종사하고 일할 줄 모르는 형제는 일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애긍은 일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간곡하고 전에 없이 엄하게 당부들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또 하나의 회칙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끝맺고 있다.

 

 

Madonna with St Francis and St John the Evangelist - LORENZETTI, Pietro
1320-25 Fresco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그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 달라 하여 들은 뒤,

천사들의 인도로 형제들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갔다.

프란치스꼬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뽀르찌운꿀라에서 임종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는 성 지오르지오(Giorgio)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지금의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

San Francesco d’Assisi, Impressione delle Stimmate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Francis in Ecstasy-BELLINI, Giovanni

1480-85.Oil on panel, 120 x 137 cm.Frick Collection, New York

 

10월 4일

우리 사부 세라핌적 성 프란치스코,부제, 세 수도회의 창설자, 대축일

 

1181(l182?)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모여와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클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성인으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복음적 생활양식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성인이 시작한 수도생활의 이 새로운 형태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교회에 가져왔고,

당시 교회의 교계제도를 거부하면서가지 성행하던 청빈운동에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관상하던 중 주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그리스도 처럼되었다.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유해는 성 프란치스코.대성전에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옹색한 자의주의자(字意主義者)로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 자존심 따위로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 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이것이 결정적인 회개였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

버림받은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당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그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

앞에서 옷까지 벗어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는 그가 문전걸식하며 돌아다니자 옛 친구들은 그의 무모한 짓을 보고 그를 미친 수도자 취급을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맨 처음 규칙은 복음의 구절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교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는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 중에 터키의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비교적 짧았던(그는 44세에 세상을 떠남) 그의 말년에는 눈이 거의 멀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그는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실제로 느끼는 오상을 받았다.

 

임종 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말했다.

"오! 주님,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그는 시편 142편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그의 장상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면 자기의 옷을 벗겨서 주님을 본받아

땅 위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 운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 www.ofmconv.or.kr

 

 

Madonna Enthroned with the Child, St Francis and four Angels-CIMABUE

1278-80.Fresco, 320 x 340 cm.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소품집, 분도출판자, pp. 107-113)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 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랍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랍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태양의 노래 -최민순신부 역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2)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4)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5)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6)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7)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8)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9)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10)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11)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12)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13)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14)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 - 류해욱신부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저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저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

두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저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자연과의 일치를 통해

주님을 찬미하고 있으며 성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히 프란치스코 영성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자주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에 매료되어 이 찬가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라는 이냐시오 영성은

바로 이 자연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말씀의 집에서(류해욱신부) http://www.sogang.ac.kr/~hwsj/

 

 

 

St. Francis in Ecstasy-CARAVAGGIO.

c.1595. Oil on canvas,92,5 x 128,4 cm.Wadsworth Atheneum, Hartford, Connecticut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의 자존심 따위도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시시의 부요했던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1182-1226년)는

그의 어머니 비카 부인이 요한으로 세례(9월 26일 성루피노성당에서 세례자요한으로)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사랑하던 부친이 프랑스인이란 뜻으로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시대는 화폐 경제체제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귀족과 시민자치단체가 대립하고 전쟁과 사회 변혁의 시대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프란치스코는 명랑한 성격으로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던 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된 후로는 오랜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회복한 이후로 점차 딴 사람으로 변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가난한 이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 중에 들은 것에 완전히 복종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프란치스코야,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스폴레토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성다미아노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나병환자와의 극적인 입맞춤을 통하여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후 그는 성 다미아노에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보속 생활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1205년말,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해에,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성당과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포르치운쿨라)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1206년 4월, 그는 자기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208년 2월 24일, 포르치운쿨라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복음말씀(마태오 10,9-10)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했으며,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 교외 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극도의 가난을 살았고,움막에서 살았으며,

일을 하고 애긍을 청했으며,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며,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에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 2회 "가난한 부인회" 일명 ’글라라회’를 창설하였으며

글라라는 가난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이니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

 

 

*성녀 클라라 축일: 8월 11일.게시판1312번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모슬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에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 했으나,포로가 된 사실이 있으며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 초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 성지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성도미니코축일:8월8일.게시판1308번.

 

1215년 11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도미니코성인을 만났을 것으로 본다.

이때 호노리오3세로 부터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허락받았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오직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가난했던 것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 철저한 고행을 했다.

그는 말년에 ’형제인 육신’에게 사과했다.

 

 

그의 가난은 겸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이 겸손은 그가 선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마음의 길잡이이며

예수의 애덕에서 요약되고 성체 성사에서 완전히 표현되는 복음적 생활을 사는 것이었다.

 

1220년 총회에서 프란치스꼬는 장상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이것 또한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 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1223년11월 29일 승인을 받았다

회칙을 인준받은 뒤, 그레치오에서 구유를 꾸며 성탄절 밤을 성대하게 지냈고,이를 계기로

성탄절에 구유를 꾸미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입었으니,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다.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셨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원하셨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 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성인의 일생을 그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것이다.

성인께서는 오상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 되었다.

 

 

1304년 베네딕토 11세가 오상축일을 제정하였으며,

9월 17일에 프란치스코 오상축일을 기념하고있다.(게시판1369번참조)

비교적 짧았던(그는 44세에 세상을 떠남) 그의 말년에는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리고 최초의 3회 회칙인 "생활지침"을 인준받았으며

시에나의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가 재속형제회의 첫회원이 되었다.

지금도 성인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성인이 세운 재속 프란치스꼬회원도 다른 재속회원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어,

그분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한다.

 

 

1224년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으신후 고통 중에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움막에 거처하면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임종’자매인 죽음’을 맞을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1226년 10월 2일 최후의 만찬을 재현했다.

10월 3일 해질 무렵에, 맨바닥에 누워 시편 142편을 불러주기를 형제들에게 청했다.

죽음의 순간에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주도록 청하였다.

 

성인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서를 곁에 두고자 했고,

우리에게 "나의 아들인 여러분,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당신들께 작별을 고하니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시오.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며 당신들 모두를 그분의 사랑에 맡깁니다."라고 축복하여 주었다.

 

10월 4일 장례행렬이 아시시로 향하였고 다미아노성당에 잠시들러 글라라와 다른 자매들이 마지막으로

볼수있게 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처음 그가 다녔고 글라라가 처음 성인의 설교를 들었던 성 지오르지오성당

(현재 성글라라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230년 5월 25일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제단아래로 옮겨졌다.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성인은 우리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이 불타올랐기에

그분에게는 오직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이같은 열정이 오상을 받게 하었고,이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완전히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적 형제애의 실현을 위해 형제적 순종,가난,작음의 덕성등,

성인께서 삶으로 증거해 주신 영성을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이 영성을 구현 시키기 위해 각자의 삶의 처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노력해야한다.

 

1939년 성 프란치스코는 이태리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Vision of St Francis of Assisi-CARDUCHO, Vicente

1631.Oil on canvas, 246 x 173 cm.Museum of Fine Arts, Budapest

 

 

 

 

St Francis Supported by an Angel-GENTILESCHI, Orazio
c. 1603. Oil on canvas, 126 x 98 cm. Museo del Prado, Madrid

 

 

 

St Francis and the Angel-GENTILESCHI, Orazio
1612-13. Oil on canvas, 133 x 98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Legend of St Francis: 15. Sermon to the Birds - GIOTTO
1297-99  Fresco, 270 x 20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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