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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성인 축일

7월31일 성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

by 하늘 호수 2011. 7. 31.

 

7월31일 성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봉헌기도 -

 

 

 

 

 

 

'타는 불'이라는 뜻인 이냐시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냉담한 마음속에 정열을 북돋아 주었다.

실로 이냐시오의 생애를 상징하는 표어를 말한다면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루가 12, 49)라는 구절이라 하겠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성행하여 교회가 위험에 이르면

반드시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성인을 보내시어 이를 보호하신다.

마르틴 루터가 이단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현혹케 할 때에도 역시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기둥,

진리의 옹호자로 한 유명한 성인을 보내셨으니, 이는 곧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라는 분이다.

 

그는 1491년 바스크 지방에서 유명한 로욜라라는 고성(古城)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신심이 두터운 분이었다.

그러나 이냐시오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 장차 용감한 기사로 출세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사업보다 오히려 명예와 쾌락을 더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는 이 세속의 아들을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고,

또한 진리를 선포하는 수도원의 창립자로 만드셨다.

 

스페인이 프랑스와 전쟁하던 때이다. 그때 30세였던 이냐시오는

전쟁에 참가해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중 폭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어 치료하는중에

여러 책을 읽다가 성인전과 샤르트르(카르누시오)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점점 읽어갈수록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고,

자연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어 현세의 허무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영신의 눈이 뜬 이냐시오는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외출할 수 있게 되자,

유명한 몽세라트 산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하고,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의 상본 앞에 무릎을 끓고 하루 밤을 기도로 지샜다.

이튿날 아침, 그는 자신의 갑옷을 성당에 바치며 화려한 기사의 복장은 걸인에게 자선하고

그 대신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 시에 가까운 어떤 동굴안에 살게 되었다.

 

그 후 10개월 동안 고독한 가운데 오로지 기도와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다.

이와 같은 명상적 생활을 하면서 ’영신 수련’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책은 묵상을 가르치는데 후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전에는 현세의 영예만을 추구하던 그가 10개월간의 수양을 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를 받아

완전히 회개하는 동시에, 자기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동료들을 모아

영적 십자군을 일으켜 끝까지 진리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선행의 첫 단계로서, 주님께서 수난하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마침 투르크 황제 소리만 1세가 그리스도 신자를 극도로 박해하고 있던 터라,

그는 프란치스코회 관구장의 권고에 의해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이냐시오는 이미 33세였는데, 자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남의 조소를 받아 가며 그 나이에 고등 학교에 들어가고 다음 대학에까지 가서

청소년들과 마친가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동료들을 규합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잠시 이단자로 취급되어 결박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미소를 띄며 "나는 예수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희생과 인내가 보답되어 비로소 두 제자가 생긴 것은 1529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즉 성 베드로 파브로와 후에 동양의 대 사도가 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성 베드로 파브르 축일:8월11일

 

그 후 또 네명의 훌륭한 대학생들도 이에 참가했으므로,

이들 7명은 우선 이냐시오와 같이 묵상을 하고 1534년 성모 승천 축일을 기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성당에서 서원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성 이냐시오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성지 순례를 계획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병으로 인해 할 수없이 연기하게 되었고, 의사의 권유로 스페인으로 돌아와 1년간 수양해야만 했다.

고향 사람들은 전에는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고 백마를 타고 씩씩한 모습으로 출정했던 귀공자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놀라며 한편으론 감탄했으나,

 이냐시오가 로욜라 성에 살지 않고 병자의 간호도 해 주는 것을 보고 더욱 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곧 예루살렘을 항하여 출발하려고 했다.

이때가 1537년의 봄이었는데, 아직도 투르크 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성지 순례는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지 순례는 중지하고 그대신 수도회에 관한 교황의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구원의 성도 로마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이냐시오가 도중에 있는 ’라스토르타’라는 소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으니까,

갑자기 황홀한 탈혼 상태에 빠져 성부께서 나타나시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닌 예수의 용모가 보였다.

예수께서는 부드럽게 그를 바라다보시며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말씀하셨다.

이때 그의 마음속에 외친 환희는 실로 큰 것이었다.

 

 

 

 

 

  

과연 로마에 도착한 후로는 만사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알현을 청했는데 쾌히 승낙을 얻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540년 9월 27일에는 그들의 수도회 예수회에 대한 인가가 정식으로 내려졌다.

 

이 수도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다른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 영적 왕국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수많은 신자를 교회에서 갈리게 한 때도,

이냐시오와 그 동료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진리를 위해 싸우며 교회의 손해를 보충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이냐시오는 수도회의 인가를 받고 난 후 겸손한 마음으로 총장직을 사퇴하려고 했으나,

교황의 직접 명령으로 15년간이나 그 직에 있으면서 회원들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그의 수면은 3, 4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고신 극기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때로는 몇개의 구운밤으로 식사를 메운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며 온순하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와 같이 할 것을 권하고,

고행은 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의 덕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단연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의 공적은 소위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 손실에 대한 가톨릭 교세의 회복에 노력한 것인데,

그의 묵상 운동과 또한 그의 제자인 성 베드로 파브르와

교리서의 편찬으로서 유명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활동은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교회의 존귀한 투사인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무수한 덕행과 공덕으로 장식된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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