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깡 수녀님
평복 차림으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K수녀님. 이 수녀님이 끼는 자리에는 웃음소리가 떠날 줄을 모른다. 얌전한 외모와는 달리, 걸음걸이나 표정이 장난꾸러기 사내아이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기발한 농담은 듣는 이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준다. 학생들에게는 물론 동료 교사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이 수녀님을 내가 만나 지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아리땁던 얼굴이 어느덧 덤덤한 중년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수녀님에게 최근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수업을 끝내고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좌석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얌점하게 버스를 기다리고만 있자니 지루하기에, 평소에 즐기는 새우깡이나 먹으면서 기다리려는 심산으로 새우깡 한 봉지를 사서 두어 개를 마악 입에 넣으려는데 버스가 도착하는 바람에 황급히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라 혼잡한 버스안에서 간신히 몸을 가누며 500원짜리 동전을 기사에게 건넸다. 기사 아저씨는 안색이 변하더니 "똑똑히 알고 돈을 내세요. 700원 더 내세요!"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좌석버스를 타본 지 오래된 , K수녀님은 고개까지 숙여 가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가방에서 돈을 꺼내서 드리겠노라고 한 다음, 우선 버스 뒤쪽 빈자리로 가서 가방과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 순간 자기 몸에 지닌 돈이라고는 500원짜리 동전 한 닢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놓인 K수녀님은 가방을 자리에 두고 다시 기사에게 가서 볼멘소리로,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한번만 봐주십사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기는 커녕 기사 아저씨는 "돈 없으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쇼"라고 쏘아붙였다. 별 도리 없이 K수녀님은 뒷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기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점퍼 차림의 50대 중반 남자가 자기 새우깡를 먹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의 새우깡을 자기 새우깡처럼 먹고 있는 정신 나간 사내를 노려보다가, 거두절미하고 새우깡을 봉투째로 홱 낚아채어 들고 K수녀님은 서둘러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정신을 좀 차리고 손에 든 새우깡을 가방에 넣으려고 가방을 열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가방 속에도 새우깡이 있다니! K수녀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잿빛 하늘은 땅거미로 얼룩져 있었고, 거리에는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맹수처러 떼 지어 질주하고 있었다.
- 조광호 신부님의 <꽃과 별과 바람과 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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