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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궁금증 해소하기

멕시코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 과달루페의 성모님

by 하늘 호수 2012. 1. 6.

 

 

 

 

 

 

 

 

멕시코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과달루페의 성모님

 

 

아마도 물질적인 모든 이념(理念)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신앙의 보강(補强)을 바라는 열망 때문에, 그 신앙의 가시적(보여 질 수있는) 뒷받침을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게 된다. 소위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열렬히 추구하는가 하면, 그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성교회가 적법여부를 판정하기도 전에 많은 인파들이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몰려들면서 그 현상들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성교회에서 적법하지 않다는 판정이 내린 경우에도 그러한 불가사의의 현상에 군중이 몰리기 일쑤이다.

루르드나 파티마의 경우는 사람들이 가라반달과 팔머 등의 지역과 비슷하게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먼저 인정함으로써 성교회의 판정과
과정을 앞지른 예들이다.

가라반달과 팔머의 경우는 소위 열성 가들이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맹렬한 기세로 널리 퍼뜨렸다. 마치 가톨릭 신앙이 그 기적적인
현상들과 긴요하게-결정적으로-연계(긴밀하게 연결됨)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사건을 널리 선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교회의 추천이 있을 때까지(역자 : 성교회의 공식 인정이 있을 때까지) 관망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작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기정화(旣定化)된 뒤에-기적으로 인정된 뒤에-불가사의한 현상들에 대하여 오히려 열성 가들이 보여 준 냉담한 태도이다.

명확히 그 현상들의 특수한 성분이 신기성(新奇性)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신기성의 비중은 진정성(眞正性:진짜)을 앞지르기 마련인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느 한 성지에-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점증하는 관심을 끌고 있음에도 세계의 이쪽(역자 주: 유럽을 가리킴)에 있는
우리

들에게 충분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성지-대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성지에 대한 논문이나 독립 기사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대서양을 건너 그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려는 성지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지극히 위대한 초자연적인 중재가 있었던 곳이다.

나는 멕시코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 성지는 어떻게 역사성(歷史性)을 띠게 되었는가? 그 성지는 우리들의 성모님이 제일차적으로-멕시코의 국민 생활의 갖가지 양상을 철저하게 뜯어고치기 위하여-멕시코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성모님이 역사 안에 들어오신 그 사건을 멕시코를 이단(異端)의 국가에서 완전히 천주교 국가로 개종시켰다. 또 그것은 멕시코를 분열에서 단결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개종하게 한 의미를 띠고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그 성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하 묘지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지상에서 지극히 위대한 세력으로 만드신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大帝)의 개종처럼 획기적인 사건에 버금갈 만한 사건의 현장으로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분명히 과달루페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그 성지 자체 보다 더 많은 주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 주제를 논하고자 한다.



신세계에 그리스도교의 상륙


나는 먼저 그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무대의 역사적인 배경부터 설명하겠다. 아메리카의 공식적인 발견자는 제노아의 토착인 콜럼버스 크리스토퍼이다. 그는 스페인 왕에게 신세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일깨워줌으로써, 스페인 왕이 그에게 항해할 선박과 선원들을 하사하게 되었으며, 여정은 71일이나 걸렸다.

콜롬버스는 1492년 10월 1일에 바하마 군도(群島)의 산살바도르에 도착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그 용감한 한 무리의 탐험가들이 3척의 배-기함(旗艦)의 이름은 적절하게도 '산타 마리아(성마리아)'호였다-에서 뭍에 내렸을 때, 그들의 본능적인 절차는 십자가를 손에 든 성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 한 사람이 앞장서서 행렬을 하는 것이었다.

그 무리들은 모래벌판이 있는 데까지 행군해 와서 십자가를 모래톱에 세운 뒤 모두 함께 '테 데움(Te Deum)'을 불렀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세계(新世界)를 소유하는 이러한 의식은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장면이었다. 그 의식은 아마도 스페인의 식민화(植民化 )의 전형적인 의식인지도 모른다. 사악한 동기와 경건한 동기가 함께 섞여 있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향해했을 뿐 아니라, 또한 부자가 도기 위하여 항해했다.

그런데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미국의 연대기(年代記)는 노르웨이의 에릭 더 레드라는 사람이 항해 끝에 서기 982년에 남부 그린랜드의 신세계에 도착했던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노르웨이의 레이프 에릭슨이라는 사람이 서기 1001년에 미국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했음을 미국 연대기는 인정하고 있다. 해양 탐험가 성브랜던이 서기 450년경 위의 두 사람에 대해서 이미 예언했는데, 첫 번째 사람은 뉴펀들랜드에 도착할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콜럼버스처럼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착륙한 다음 지금의 마이애미에 닿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더욱이, 멕시코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서기 700년경에 대서양(大西洋)을 건너온 아주 키가 큰 한 사나이가 아즈택(역자 주: 멕시코의 원주민)족의 조상이었던 톨텍족에게 설교를-꽤 키가 큰 사나이는 아마 그리스도교인인 것 같다-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복자 코르테스가 오다 키가 큰 사나이는 자신의 이름은 쿠출레 인이며, 이른바 성인들과 학자들이 사는 섬(the Island of Scholars ; 아일랜드의 별칭)에서 왔다며 자기소개를 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설교)의 잔재가 멕시코 원주민들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해 왔기 때문에 훗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나는 이제 우리의 동정녀 마리아 성모님이 중재에 나서기까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1519년에 신대륙 정복자인 스페인의 코르테스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멕시코에 상륙했으며, 1512년경에는 멕시코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코르테스는 멕시코에서 인구가 800만이나 되는 문화 수준이 높은 원주민들을 발견했다. 그들을 한 사람의 황제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38개국에 달하는 통치 조직과 사법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이 문명의 장엄함을 인정하고 그 문명 제국을 하나의 나라로 대우해 주었고, 나아가 그 문명 제국을 찰스 5세와 동등한 동반자로서 신성 로마 제국 안에 통합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는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소위 인간 제물의 개념 위에 기초한 무시무시한 형태의 이교(異敎)였다. 해마다 대단히 큰 아즈텍 축제일에 2만 5000명가량의 인간들이 모든 신에게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 인들은 늘 전쟁에서 동물적인 잔학 행위들을 저질렀다.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떠난 후에도 그러한 잔학 행위가 잇따라 일어나자, 멕시코 인들 사이에 정복자들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오는 토착민들의 교육 개발 및 그리스도의 복음화(福音化)를 겨냥했던 스페인 식민화의 긍정적인 요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황제 찰스 5세가 제정한 법률을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서인도 추밀원(樞密院)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증오가 드러났었다. 피정복 대중을 실제로 노예 상태로 깎아 내린 스페인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식민 국가들 가운데 어느 나라도 그와 비슷한 잔학 행위를 감행한 바 없었다.

아즈텍족은 새 신앙에 무감각 스페인 식민지화의 한 가지 특수한 성격은 피정복 원주민을 가톨릭화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제들이 많은 식민지에 파견되었으며, 그 결과는 여러 나라를 복음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처음에 이런 복음화는 피정복 민중의 반발로 말미암아 멕시코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멕시코가 정복한 후 10년 동안 개종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불가사의한 현상(기적)이 일어날 당시에 멕시코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범국민적인 모반이 출범될 시기였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에 아즈텍족이 그곳에 있는 모든 유럽인을 살해하려면 쉽게 살해할 수 있었다는 상황을 일단 인정해야 한다. 당시는 무엇인가가 터지게 되어 있는 모든 유럽인을 살해하려면 쉽게 살해할 수 있었다는 상황을 일단 인정해야 한다. 당시는 무엇인가가 터지게 되어 있는 최고의 긴장이 감도는 순간으로서 일종의 전환기였다.

멕시코와 스페인의 운명은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는 비슷한 힘의 평형을 이루었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은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불가사의한 기적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해소되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발현하시게 된 사건의 개략이다.

 

 
불가사의한 성모님의 발현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상륙한 지 39년이 지났을 때였다. 서기 1531년 10월 9일에-무염시태 축일이었다-57세가 된 주안 드 디에고라는 인디언은 그리스도고의 신심이 아주 깊은 사람으로서 그날 미사에 참례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은 아내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 온 외방 전교 집단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그 후 오래 살지 못했다. 중산층인 그는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멕시코시의 외곽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날 그가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자기 나라말로-특히 배운 사람들의 특유한 악센트로-말을 걸어온 한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성 마리아, 영원한 동정녀, 참 하느님의 모후(Holy Mary, Ever Virgin, Mother of True God)'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쉽게 성모님을 알아보고는 성모님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에 계속 귀를 기을였다. "멕시코의 주교님에게 찾아가서 내 이름으로 이 언덕 위에 성당 하나 짓기를 원한다고 전하여라." 의심할 나위도 없는 그는 주안 드 줌마라가 주교의 주교관으로 찾아가서 알현을 허락받아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주교가 그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레지오 마리애 단원인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 추정(짐작)을 해서는 안된다.

그 주교는 학식이 있었고 더욱이 성직자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현상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인디언 주안 드 디에고는 자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 언덕의 성모님에게로 갔다. 그가 알현했던 일을 성모님에게 보고한 뒤, 자기보다 더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심부름꾼을 마련해 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소박하게도 성모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주안 드 디에고를 다시 그 주교에게로 보내셨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안 드 디에고를 귀찮다고 생각한 주교는 성모님께서 몸소 이리로 오시든지, 아니면 성모님을 입증하는 표징(表徵)을 나타내 보이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시라는 전갈과 함께 그를 돌려보냈던 것이다.

성모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계셨다. 그 인디언은 주교의 말을 그대로 성모님에게 전했다. 성모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언덕 위에 올라가면, 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그 꽃들을 꺾어서 주교에게로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그곳은 온통 바위뿐이며 아무것도 나지 않는 불모지(不毛地)인데다가 기온이 영하라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그는 우아한 장미꽃이 풍성히 피어 있는 현장을 발견하고 그 꽃들을 꺾어 가지고 다시 성모님에게로 갔다. 성모님은 손수 그의 망토의 여러 곳에다 꽃들을 달아 주셨다. 그대로 그는 주교관으로 가서 간신히 알현 허락을 받아냈다. 그때, 주교는 어떤 두 사람과 함께 계셨다. 그 인디언이 망토를 벗어 제쳤을 때 기적의 장미꽃들이 바닥에 떨어져 장미꽃이 나뒹굴었다. 하지만 인디언 신자가 벗어 제칠 때 떨어진 장미꽃이 망토 앞에 무릎을 꿇은 주교에게는 별 생광스러운 인상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교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무릎을 꿇어 존경의 뜻을 나타낸 것은 그런 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인디언 신자가 걸치고 있는 망토의 표면에 그 인디언이 테페약 언덕에서 본 그대로의 여자의 상(像)이, 즉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교가 하나의 표징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주교에게 주어졌던 것이며 그것으로 족했다. 주교는 그 기적적인 성모님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하여 테페약 언덕 기슭에 성모님의 성당을 짓기로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

 

이 성당은 찰흙을 햇볕에 말려 만든 어우도 비 벽돌로 세워졌는데, 크기는 가로 세로 다 같이 15피트로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14일 만에 준공했다. 성당이 지어지는 동안에 성모님의 성상은-그 인디언 망토에 새겨진 성모님의 성상-주교좌 성당에 보관되었고, 그 후에 다시 성전 안에 옮겨 모셔졌다. 성모님의 성상이 새로 지은 성당으로 엄숙하게 옮겨지고 있는 동안에 한 인디언이 우연히 화살에 맞아 살해되었다. 그 시신이 성모님의 성상(聖像) 앞에 놓여 졌을 때 갑자기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 살아난 자는 후에 망토에 드러난 성모님 성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 또 천주교 교리 문답을 가르치는 주안 드 디에고의 활동을 돕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533년에 그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성당이 지어졌으며, 또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지성소(the great Sanctuary of Our Lady of Guadalupe)가 준공되어 성모님에게 봉헌되었다. 1754년 교종 베네딕트 14세께서는 그 성상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그 성상이 기념물이 되는 것과 더불어 성모님이 언덕위에 발현하신 그 사건에 대해 교종 베네딕트 14세께서 언급하면서 시편 147장 20절을 인용하였다. "다른 민족은 이런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줌마라가 주교는 기적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하등의 의혹을 갖지 않았다. 처음부터 주교는 섭리에 입각한(섭리를 쫓은) 인디언 신자인 주안 드 디에고의 사명과 그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파악하였다.
주교는 성모님의 성상을 보관하는, 이른바 성역화(聖域化)의 책임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성당의 동쪽 벽에다 방 하나가 추가로 잇대어져 지어졌는데, 이것은 주안이 생활할 수수한 거처(居處)로 쓰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주교는 성모상을 보호하고 관리할 전적인 책임을 그에게 맡겼다. 주안 드 디에고는 거기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 거처에 들어오기 전에 자기가 살던 집과 재산을 모두 삼촌에게 넘겨 주었다.

 

 

놀랍게도 800만 명이 개종하다

 

놀라운 이 사건이 멕시코 전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하자, 성모상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 겸 성모님의 발현 전말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인디언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주안 드 디에고는 성모상과 발현하신 성모님의 증인으로서, 전말을 되풀이하여 말해 주는 한편 가톨릭 신앙을 누누이 설명해 주었다. 이 거창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는 다른 개종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기적과 맞먹는 수준의 기적을 일으켰다. 7년 동안에 멕시코의 전 지역에서 800만 명이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멕시코 땅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일격에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인디언들과 스페인 사람들 간의 상호 이해와 융합이 비정상적인 증오의 자리에 들어섬으로써 비로소 멕시코는 완전한 국가 형태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 성상의 진정성(眞正性)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를- 구성하는 몇 가지 압도적인 환경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주안 드 디에고가 당시 입고 있었고, 또한 성상이 새겨져 있었던 그 망토는 소위 아야테 섬유로 만들어진 것 이였다. 상유층만이 면(綿)으로 된 옷을 입었을 때였다. 아야테는 용설란이라는 식물로 만든 섬유이다. 주안의 망토는 두 개의 조각을 부드러운 실로 기운 옷이었다. 빛깔은 흰 색이었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섬유 위에 성모상이 황홀한 빛깔로 드러나 있었다. 무려 4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황홀한 빛깔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있다 처음 116년 동안에는 그 성상이 보호 유리관 안에 보관하지 않았지만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아니, 분명하게도 그 성상은 당대의 멕시코에 존재했던 어떤 화가의 능력을 초월하는 경지의 수준이다.
그렇게 조잡한 섬유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비평가들의 회의적인 반등


물론, 우리 인간의 삶의 방식이 그러하듯이 그 성상의 진정성이 성의(聖衣)처럼 의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훗날 성모상이 유럽의 어느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단 한 가지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조차 대지 못했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예술가 자신의 서명, 즉 낙관(落款)이 있기 마련인데도, 그러한 낙관이 이 성상에 없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는 주님의 피가 골고타의 언덕에서 사라지자마자 비평가들은 주님의 인성(人性 :humanity)과 주님의 죽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신 분이 성 예레니모 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긍정의 증거가 부정의 증거보다 훨씬 더 많다. 식물성 물질인 아야테는 부패하는데, 이러한 부패의 과정은 착용(着用)의 정도에 따라서 급속히 진행될 수 있다. 만일 조금도
착용하지 않았더라도 기껏해야 25년 정도 지속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성상의 경우에는, 근 450년 지난 후에도 그 섬유 조직은 결코 썩지 않고 있으며, 처음 만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하고, 성상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섬유의 표면에 페인트를 묻히지 않고 그런 종류의 그림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미경으로 현대적인 조사를 해보아도 도료를 사용한 흔적이나 솔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성상의 성격을 굳이 따진다면 섬유 위에 찍힌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도료와 솔이 없이, 혹은 카메라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사진이 찍힌 것이다! 그런데 사진 기술이 발견되기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의심하는 인간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 잇따라 일어나는 과학적인 전문 기술이 그 성상의 모순을 찾아내기 위하여 부단히 동원되었다.
첫째로 최초의 현미경과, 발전을 거듭해 온 현대적인 초강력 현미경들이 그 성상에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광선(新光線) 혹은 화학적인 과정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매번 정확한 검사에도 불구하고 가짜임을 확인해 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확인해 주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을 뿐이다.
성모님의 눈동자에 비친 반사 최신의 장비를 동원한 이 모든 탐색은 갖가지 양상 가운데서도 지극히 놀라운 한 가지를 노출시켰다. 현미경을 통해 성모상의 눈을 살펴보았을 때, 방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상(像)이 드러나 있었다. 즉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상이 성모님의 눈에 반사되어 있었다.
현미경 렌즈에 잡힌 이러한 반사 물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정상적인 눈에 비칠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굴곡과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치 방 안에 성모님이 서 계시는 가운데 어떠한 사진 장치(카메라)도 없는 상황에서 망토에 사진이 찍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때 성모님의 눈은 성모님 앞에 펼쳐진 장면을 자연스럽게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현미경에 잡힌 인격체는 모두 세 사람으로 한 사람은 확실히 인디언 신자인 주안 드 디에고이고, 한 사람은 성모님 발현 당시에 멕시코의 줌마라가 교구장으로 있었던 주안 곤잘레스 주교이고, 또 한 사람은 멕시코의 총행정관으로 임명되었던 세바스찬와이 푸엔레알 신부였다.

 


성모님의 유일한 천상의 사진


이것은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점(論點)을 제기한다. 만일 망토 위에 표현되어 있는 성상의 눈에 사진이 찍힐 수 있는 감광질(感光質)이 정말 부착되어 있다면, 왜 그 감광 질이 하필이면 성상의 두 눈에만 한정되어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히 성상의 얼굴도 사진의 범주에 드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망토 위에 표현된 성모님의 성상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유일한 사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성모님을 상상하는 모든 사람들은 말로만 성모님의 모습을 묘사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러한 언어 묘사가 우리들을 얼마만큼 진실에 가까이 인도할 수 있겠는가? 진실에 아주 가까이 인도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언어들이란 다만 인상을 실어다 줄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視角)이 있다. 비평적인 입장의 관찰자들은 성모님의 성상이 인디언이 아니라, 중동인(中東人)의 한 사람으로서 혹은 달리 표현하면 유다인 여자로-성모님의 출신이다-묘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성상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는 금세기 초에 성상 앞에 놓여 있었던 꽃다발 안에 강력한 시한폭탄의 폭발에도 끄떡없이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모는 멕시코에서 이 성상에 대한 신심으로 인하여 자기네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권능의 위대함을 보았던 종교 세력들, 즉 가톨릭에 해악을 끼치려는 박해자들에 의하여 계획된 일이었다. 그 시한폭탄은 바실리카 풍의(장방형의)성당을 중심으로 상당한 범위에까지 심하게 파괴할 만큼 파죽지세(破竹之勢)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도 유리관 안의 그 성상은 조금도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였다.
제대 위의 성상 앞에 놓인 무거운 철제 십자고상은 온통 우글쭈글하게 되어 흉한 모습으로 변했다. 범인들이 고상을 그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자 자연히 격분은 그 범행을 획책한 자들에게로 옮겨 가게 됐다. 천만 다행으로 성모상을 보존하게 된 이 기적의 위대성은, 그 사악한 사람들이 파괴하려고 기도했던 신심을 오히려 널리 펴고 늘리는 데 이바지했다.


결과 :

 

인디언들이 자기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다 멕시코의 원초적인 개종의 이 서사시에서 배울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교훈이 있다. 그 개종은 우리의 복되신 성모님에 의하여 출범되고 배양되었다. 하지만 그 신앙의 표현은 주안과 인디언 협조자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주안과 인디언 협조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그들이 언어를 배워 알고 있었고, 또 그들은 자신의 동포들에 대하여 의심을 하거나 의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멕시코 백성, 즉 토착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협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성모님의 성상이 새로 지은 성당으로 옮겨지는 동안에 살해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인디언이었다. 그 인디언이 되살아난 이유는, 그가 자기 동포에게 성모님과 하느님의 아드님(성자)에 대한 진리를 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이 성모님에게 다시 봉헌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하게 도왔던 다른 인디언들도 아마도 커다란 은혜를 받음으로써 주안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어쨌든 7년 동안에 멕시코의 개종은, 매일 멕시코의 전역에서 몰려오는 많은 군중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성모님의 발현 이야기를 지칠 줄 모르고 계속했던 테페약의 그 사도들의 집단에 의지하고 의존하였던 것이다.
멕시코의 토착민들 즉 인디언들이 왔고, 인디언들이 보았으며, 인디언들이 들었고, 인디언들이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에게 정복되었다. 그 뒤, 그들은 그때까지 증오했던 사제들을 마침내 찾아가게 되었으며, 또한 교회는 그들을 정중히 맞아들였다.
우리들은 그 독특하게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사도직 수행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바로 그 요체를, 알맹이를-마리아의 이름 아래 복음화의 활동에 보통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찾을 수 없는 것인가? 전체 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께서 스스로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던 그 감화(感化)의 원리이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한 곳이 과달루페보다 더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기묘한 사실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루르드인가? 파티마인가? 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로마이다. 오직 그리스도 왕국의 중심부만이 해마다 과달루페보다 더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 천주교 백석동 성당 카페 게시판, 강옥중 글 <제 6 장 멕시코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중에서 -

 


(Inessa Galante)

Ave Maria

카치니 / 아베마리아

Giulio Caccini (154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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