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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아! 어쩌나?

[아! 어쩌나?](156) Q.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by 하늘 호수 2012. 6. 22.

 
[아! 어쩌나?](156) Q.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Q.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복음말씀을 묵상하다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는 말씀을 보고 난 후 제 마음이 아주 힘이 듭니다.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또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 말씀처럼 용서해야 하는지 착잡한 심정입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까요?
 
 A. 신앙생활이건 일반생활이건 용서는 참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신문 기사에 실리는 일 중에 상당 부분이 용서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처럼 용서가 인간사에서 중요한 주제이기에 우리 교회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용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숙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 중에 혹은 일상대화 중에 '용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막상 용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하기 어려워합니다. 용서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안 돼 그런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용서에 대해 가진 잘못된 개념부터 설명을 드리지요. 많은 분이 용서란 내 마음의 불편함을 누르고 상대방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억울하지만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또는 '천주교 신자가 왜 저래'하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혹은 사람을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등의 개념을 갖고 불편하고 작위적 용서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 개념은 수준이 낮은 데다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는 생각들입니다. 이해가 돼서 용서된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용서라는 외적 행위를 수없이 한 것이기에 마음 안에 앙금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 편한 용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용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부터 식별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용서를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그런 식의 용서는 피상적 용서에 그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어서 자기에게 이롭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서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이로움을 주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혹은 잃는 것은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 대한 심한 분노를 가진 상태에서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분노는 정당한 것이야. 그런데 네가 그렇게 화를 내고 용서를 못 하는 동안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아무것도 없잖아. 얻는 것이라고는 화병과 병원비뿐이지'하면서 자신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이 '그래,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내려놓고 용서해야겠구나'하는 결론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이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자기 성찰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은 자기 성찰을 죄의 개수를 세는 것으로 착각해서 심한 경우 세심증, 완전강박증에 걸려 고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기 성찰을 하는 이유, 기도할 때마다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병적 죄책감에 시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성찰은 내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허물이 많았는지를 살펴보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를 돌아보기 위한 시간입니다.

 대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고 사는 존재인지를 살피는 자기 성찰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인에 나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서 단죄를 받을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용서를 받아본 사람들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나이가 든 사람들부터 떠났다고 하는 것은 신체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 연령 즉, 자기 성찰을 잘하고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 성찰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으면서 살았는지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데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을 보면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면서 살았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삶이 우울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던 것은 그냥 병적 죄의식에 사로잡혀 산 것이 아니라 허물 많은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받아주고 용서해줬는지를 늘 인식하고 감사하고 살았기에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용서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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