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 글/- 묵상 글

어떻게 실망을 처리합니까?

by 하늘 호수 2014. 1. 2.

 

 

 

 

 

 

자녀가 없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늙은 나이에 소중한 외아들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바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여겼습니다.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10살이 되자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하얀 와이셔츠, 빨간 나비넥타이를 메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같은 날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모퉁이, 부모가 잠깐 한눈 판 사이, 달려오던 노란 유치원 버스와 부딪혔습니다. 아이는 그 자리서 죽었습니다. 그 부부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말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주신 시련이니 참고 견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이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격언과 고전은 신과 하늘의 이름을 빌어 표현합니다.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인생에 실패를 끼워준다.' '하늘이 어떤 이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맹자) 우리는 최대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건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결과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욥기의 오래된 주제와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성숙하기 위해. 단련하기 위해. 시험하기 위해. 하지만 시련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수용이 아닙니다. 좌절입니다.

 

'신정론(神正論)'.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모순을 신적 섭리의 일부로 보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세계의 부조리는 인간이 빚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내치기 위해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화와가 지은 죄의 결과 때문에 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인간은 시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련 자체가 성숙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상처는 사람을 키우기도 하지만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고통을 우상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고통은 고통일 뿐입니다. 깊은 고통 앞에 서 있는 영혼 앞에서는 입을 다물게 됩니다. 어떤 가르침도 그 상실을 대신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충고보다 필요한 건 공감과 침묵입니다. 참된 위로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인간을 파괴합니다. 유기, 방치, 시기, 질투, 저주, 폭언, 폭행.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영혼은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영혼입니다.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없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피를 팔고, 여자 아이들은 몸을 팔고, 마땅히 받아야 할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제외된 결과입니다. 원망과 험담, 불평과 불만에 찬 영혼은 좌절에 침식된 영혼입니다. 똑똑하고 정의로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겁니다. 해고되고, 헤어지고, 무시되고, 제외되고, 버려지고, 날카롭게 깨진 마음의 파편으로 다른 마음에 생채기를 냅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모든 고통이 모든 영혼을 파멸시키진 않습니다. 모든 상처가 모든 영혼을 마비시키진 못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아픔으로 평범함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절을 겪고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처를 먹어치운 영혼은 강합니다. 고통 받는 타인의 삶을 더 깊이 공감하는 영혼이 됩니다. 눈부신 날개를 단,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비판과 험담에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맷집에 강합니다. 그제야 시련을 통한 성숙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성인들은 독사에게 물리거나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독은 모욕과 저주, 위협과 공격입니다. 인간을 마비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성령의 힘 안에 사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합니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은 성인,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성인, 온 몸에 화살 구멍이 난 채 죽은 성인, 오래된 순교자 성화는 상처받은 영혼의 표상입니다. 죽어가는 성인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내장이 꺼내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고, 몸이 동강 나도 담담히 바라봅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의지가 아닙니다. 은총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길을 앞둔 전날 밤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분은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고통에 대한 정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고백의 기도를 먼저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길을 걸으셨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련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의 고통과 죽음을 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를 되돌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망은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기심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생명의 본능입니다. 반대로, 희생은 이기심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본능과 사심을 넘어서게 만드십니다. 모든 감동과 삶의 영감은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도 솔직함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길도 아버지의 뜻입니다.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같은 상처 속에서 쓰러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실망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구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은총을 청할 수 있습니까?  삶의 주도권을 내맡길 수 있습니까? 명작과 졸작은 같은 가마 안에서 태어납니다. 발효와 부패는 모두 미생물의 작용입니다. 누가 만드느냐에 달렸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최고의 장인입니다.

 

- 길잡이(2014. 1월), 성서사목국 -

 

 

 

 

  

 

  

반응형

'묵상 글 > - 묵상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의 소망  (0) 2014.01.06
사랑은...  (0) 2014.01.04
신의 웃음  (0) 2013.12.27
황창연 신부님 대림특강 (2013년)  (0) 2013.12.16
피고석의 죄수  (0) 201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