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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성지따라 발길따라

베들레헴 성 가타리나 성당과 예로니모 경당 - 이스라엘 성지순례 17

by 하늘 호수 2018. 4. 15.




이 성당은 1881년 프란치스코회에서 세웠다.

이 성당에서 예루살렘 주재 가톨릭 대주교가 해마다 12월 24일 성탄 자정미사를 집전하며 전 세계에 방송으로 중계된다.

가타리나 성당에서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 예수 탄생 동굴과 구유동굴 비슷한 동굴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로니모 (347-420) 성인께서 서재로 쓰시던 경당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친구 다마수스 교황의 뒤를 이어 후임 교황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상심한 나머지 로마를 떠나

386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무려 34년간 은거하면서 신.구약성서를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원전에서 라틴어로 완역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이 번역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불가타 역본으로 오늘날 가톨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서이다.


-분도여행사 성지순례 책자에서 발췌 -



성 가타리나 성당에 있는 구유. 예수님 탄생지







성당 지하로 내려가면...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예로니모(Jerome)
축일: 9월 3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교회학자, 성서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47-419년
같은이름: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 T♧♧♧♧ T♧♧♧♧

• 달마티아(Dalmatia)의 아퀼레이아(Aquileia) 근처 스트리도니아(Stridonia)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Hieronymus Sophronius, 또는 예로니모)는 12세 때 로마(Roma)에서 당시의 저명한 문법학자인 도나투스(Aelius Donatus)의 문하생으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19세 때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그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Trier)에 정착하여 정부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하에 같은 뜻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안티오키아(Antiochia)에 머물면서 라오디케아(Laodicea)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성 바오로(Paulus) 전기"를 썼다. 그런데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Arius) 이단 문제로 대립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379년 안티오키아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3월 9일)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 등이 주축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그의 후원자이던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일부 적대자들이 여자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성녀 바울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귀족 부인 성녀 바울라가 따라와서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그리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을, 성 히에로니무스는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맡았다.


· 그 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을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의 지지자이며 성경 번역에도 공이 있던 루피누스(Rufinus)와의 사건이었다. 본래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성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아의 에피파니우스와 예루살렘의 요한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이때 에피파니우스를 지지함으로써 요한을 지지했던 루피누스와 등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오리게네스주의와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한 394년부터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와 서신 연락을 하며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몰아내는데도 힘을 보탰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했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경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경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경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os)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 펠라기우스주의자인 폭도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예로니모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불가타 Vulgata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성 예로니모 사제의「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Nn.1.2: CCL 73,1-3)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는 성서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성서를 파고들어라." 그리고 "찾으라.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할 때,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능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시라면 성서를 모르는 이는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창고에서 새 것과 옛것을 끄집어내는 집 주인을 본받고 싶으며,

또 아가에게 "아, 임이여, 햇것도 해묵은 것도 임을 기다리며 마련해 두었답니다."고 말하는 그 신부를 본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요 사도로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다음 말씀을 자기 자신과 다른 복음 전파자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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