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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 궁금증 해소하기

"[바오로의 해] (2) "나는 하느님 교회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by 하늘 호수 2008. 6. 28.
"[바오로의 해] (2) "나는 하느님 교회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다마스쿠스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서기 35~36년 어느 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2~3년쯤 지난 시점이다.

 유다 율법을 신봉하는 바리사이파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예루살렘에서 200㎞ 떨어진 지금의 시리아 땅)로 말을 몰았다.

 예수는 이미 두 해 전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뒀다. 그런데도 부활이니 오순절 성령강림이니 하는 괴소문(?)이 끊이지 않고,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디아스포라(이스라엘 밖 유다인 집단거주지)로 달아나 비밀집회를 열고 있었다.

 바오로는 율법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그들을 보고 분개했다. 그의 손에는 대사제가 발행한 그리스도인 체포령이 들려 있었다.

# 주님은 누구십니까? 
 태양이 작열하는 끝없는 사막을 가로 지를 때였다.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같은 빛이 쏟아지더니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날뛰는 바람에 그는 땅으로 나자빠졌다. 그는 섬광같은 빛에 눈이 멀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잠시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도 9, 1-19 참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소리는 들리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멍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은 얼이 빠진 그를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그는 예수가 보내준 하나니아스에게서 안수를 받고 난 뒤에야 눈에서 비늘 같은 게 떨어져 다시 볼 수 있었다.
▲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을 묘사한 카라바조의 '성 바오로 회심'(캔버스에 유화, 230x175㎝, 1601년 작,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성당). 강렬한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는 두 다리와 팔을 벌린 채 무기력한 상태다.

 유다교 이탈자들을 색출하러 가는 길에서 만난 봉변, 이 다마스쿠스 사건으로 그는 교회 박해자에서 열렬한 복음 선포자로 변신한다. 기운을 차린 뒤 즉시 다마스커스 회당에 뛰어 들어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은 그가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사도"(로마 1, 1-2)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된다.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이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차원에서 봐야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격에 빠진 바오로에게 하나니아스를 보낼 때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고 일러줬다. 바오로도 "(하느님은)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라며 이 사건이 계시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밝혔다.

 그럼 주님은 왜 교회를 없애버리려고까지 한 바오로를 '그릇'으로 택했을까? 더구나 과장된 겸손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를 "칠삭둥이 같고,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1코린 15, 8)이라고 하는 자를 말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 "나는 하느님 교회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킬리기아 지방 타르수스(사도 21, 39 현재의 터키) 사람이다. 집안 전통에 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다인이었다. 율법이 명하는 대로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는 회심 이전에 예루살렘을 몇 차례 방문했을 것이다. 흠잡을 데 없이 충실한 율법 엄수(嚴守)자였기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동경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예 이주해서 살은 적도 있는 것 같다.

 "나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사도 22, 3).

 가말리엘은 매우 유명한 바리사이 율법교사다. 바오로는 스승의 영향으로 율법 열광자가 됐다.

 또한 타르수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깃발 아래 있던 그리스 로마 도시였는데, 산업과 교역이 번창했다. 특히 소아시아 그리스 문화(헬레니즘 문화)와 근동의 셈족문화(히브리 문화)가 교차한다.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두 문화를 접하며 타문화에의 개방성을 익혔을 것이다. 두 문화권에서 성장하며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언어를 구사하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 주님 섭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는 구체적 정황은 밝히지 않았으나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다"(1코린 15, 9)고 털어놨다. 스테파노가 모세와 율법을 모독한 죄로 성 밖에서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는 그때 여느 유다인들처럼 스테파노의 메시아 증언에 노발대발하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스테파노 순교는 역으로 복음의 씨앗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난과 박해에 놀란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까지 흩어졌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이들을 붙잡아 들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거기서 한 순간에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혔다. 그러자 전에는 이롭던 것이 모두 해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필리 3,7).

 불 같은 성격의 바오로는 그때부터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려는 주님의 종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사도 바오로

   ▨ 사울과 바오로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사도 13,9)

 사도행전에 사도의 이름은 바오로, 사울 두 개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중간에 개명(改名)을 한 것은 아니다.

 사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다사회 전통에 뿌리를 둔 이름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통용된 이름이다. 두 이름은 사도가 두 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유다인 혈통을 강조한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필리 3, 5).

 그러나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 이후 그는 거의 대부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유다사회 안에서 시작된 그의 선교활동이 그리스 로마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가 자신의 이름을 사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시편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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