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서 영필 안젤로 수사, ssp
어머니와 썰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시로 향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울이라도 사대문 안이 아니면 초가집이며 동네 가운데 우물이 있는 풍경이며
여느 시골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엔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주변에 밭이며 논이 많았습니다.
논의 물이 꽁꽁 어는 겨울엔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놀이터가 되곤 했지요.
아이들이 타는 썰매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고가의 신기한 장난감이 넘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썰매는 가장 갖고 싶은 놀이기구였습니다.
옆집에 막 신혼살림을 차린 부부가 살았습니다.
당연히 세간들은 반짝반짝 윤나는 새로운 것들이었지요.
어느 날 밖이 소란스러워져서 살펴보니 옆집의 새댁 아주머니가
어머니 앞에서 펄펄 뛰고 난리가 났습니다.
아들네미가 신혼살림으로 막 장만한 장롱 서랍을 가져다
썰매로 만들어 타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모든 건 이미 저질러진 뒤였지요.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하겠지만
내 집 네 집 없이 이웃 간에 허물없이 드나들던 시절이라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의 표정은 평소의 온화함이 사라지고
제가 한창 빠져있던 만화영화에 등장하던 무서운 악당처럼 점점 험악해져갔습니다.
방안에 숨어 조마조마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저에게 퍼뜩 든 생각은
그 자리를 떠나야 살 수 있다는 일종의 본능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순간의 판단이 내려지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뒤따르고 제 달음질은 필사적이었습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뛰고 있는 저에게
“너 거기 안서냐”는 어머니의 외침이 아득했습니다.
“엄마 같으면 서겠냐고요!!”
막다른 골목에서 거의 뒷덜미에 다다른 어머니의 추적을 뿌리치고 담을 넘은 건
하느님의 보살핌이었습니다.
하지만 담을 사이에 둔 어머니와의 기약 없는 대치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온갖 협박과 회유가 시작됐습니다.
“이리와라. 엄마가 맛있는 것 줄게. 응 아가 이리와.” 하지만 넘어갈 제가 아니었습니다.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고 반복되는 말썽으로 죄 와 벌, 용서와 속임수, 회유와 유인 등등의
숨은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기나긴 농성과 대치 끝에 어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긴장된 대치는 끝났지만 문제는 제가 갈 곳이 없었다는 거였지요.
별수 있나요.
어머니한테 잡히면 끝장이다 싶어 평소 동네 아이들과 만들어 두었던
산속의 비밀장소로 숨어들어갈 밖에요. 쫓고 쫓기는 기나 긴 하루가 지나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내가 저지른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춥고 무서웠습니다.
“집에 가면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고 포근한 이불과 아랫목이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 용서를 빌까?
아니야, 안 되지. 낮에 목격한 엄마의 그 표정으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조그만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는 어둠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잠드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짙어지는 어둠에 주위는 더욱 적막해지고
추위와 배고픔과 무서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머니가 잠드셨으리라 생각하고 살금살금 집으로 스며들어갔습니다.
슬며시 방문을 여는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지요.
어머니가 주무시지 않고 앉은 채로 어둠속에서 절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아 이제 끝이구나.” 체념으로 무너지고 있을 때 차갑게 굳어진 제 손을 감싸는 건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었지요. 방안에 불이 켜지고 보자기로 덮여진 밥상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에구 많이 추웠지,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라."하시고는
따뜻한 손으로 제 볼을 감싸고 꼭 안아주셨습니다. 어머니의 품은 봄날처럼 따스했고
온 종일 저를 짓눌렀던 불안과 긴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백일 같았던 하루의 시름을 잊고 깊고 깊은 잠속으로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수님께 저는 어머니 속을 썩이던 철없는 아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설픈 열정으로 저를 다스리지 못하던 젊은 날, 순전히 제가 저지른 잘못으로
예수님을 상심케 하고 도망치려했던 적이 그 얼마일까요.
미숙하고 어리석은 시절 이었기에 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인정에 목말랐으며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섬김을 받으려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했고 유혹에 빠져 어둠 속을 헤맸습니다.
마음에 품었던 이루지 못한 원망과 미움과 좌절의 감정들이 모두 제게 다시 돌아와
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지요.
예수님 곁을 떠나겠다고 짐을 쌌던 것은 또 몇 번 일까요.
그러다 다시 붙들려 와서는 그분의 사랑 앞에 저의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그 분 안에서 평화를 찾곤 했습니다.
저는 몇 번이고 떠났지만 예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잘못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따듯하게 품어주신 그 날의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주님! 제가 어찌 당신 곁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수도원 뜰은 지금 막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 서있습니다.
어머니는 연로하셨고
저 또한 이 계절처럼 그때의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의심과 자만과 방황의 부끄러운 지나버린 날들 너머에
시간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나의 등불,
그리스도께서 한 결 같이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겁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시편:23,1-6)
성바오로 인터넷서원지기 할배 수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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