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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은퇴? 죽음? 무슨 당치 않은 소리 - 권이복 신부

by 하늘 호수 2016. 10. 5.

[ESSAY] 은퇴? 죽음? 무슨 당치 않은 소리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나는 80이나, 90, 100년 한정된 삶을 살다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영원에서 와서 영원까지 살아 존재하는 나… 그 영원의 일부를 사는 것이다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

낯설다. 아직도 어색하다. 내가 사제요 신부라는 사실이. 가끔 누군가 "신부님!" 부르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듯하여 멈칫하곤 한다. 사제로 서품된 지 만 37년이 지났는데도, 이제 곧 은퇴할 나이인데도…. 그런데 이젠 그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되게 됐다. 즉 내가 신부인가 신도인가, 부자인가 가난뱅이인가, 지식인인가 무지렁이인가, 심지어 남자인가 여자인가도 전혀 문젯거리가 안 될 나이가 됐다. 문제는 오직 하나, '죽느냐 사느냐!' 이것만이 문제이다. 목이 타 죽을 지경이라면 한 말의 진주(眞珠)도 생수 한 병과 맞바꿔야 할 것이고 얼어죽을 지경이 되면 수백억 돈다발도 그냥 태워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이 코앞인데 금도 은도 버리지 못하고 명예나 신분에 연연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런데 나는 이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 나이, 이 시점에, 내가 신부인들 어쩔 것이며 거지인들 어쩔 것인가? 죽음, 죽음이 바로 코앞인데.

사제 37년!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다른 길을 택할 뻔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지금부터 25년 전 나는 이제 그만 이 낯선 옷을 벗어던져야겠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여 교구를 떠나 2년간 막노동판, 공장 등지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 하루하루 먹고살았다. 그러다가 다리를 다쳤고, 또 이젠 더는 그 결단을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 먼 예수님의 나라 이스라엘로 순례를 떠났다. 4개월 동안 단 하루도 호텔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적은 돈만 갖고 떠났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찾아간 곳은 갈릴리 호수가 정원처럼 내려다보이는 갈릴리 산꼭대기에 있는 형제들의 작은 은둔소였다. 감자, 양파를 볶아 허기를 메우며 하루하루 보내는데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감자 삶아 먹자고 그 비싼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 스물여덟에 시작해 마흔 넘도록, 아니 신학생 시절부터 치면 더 긴 세월, 내 온 청춘을 바쳐 살아온 이 삶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그분이 살았던 현지에 와보니 '나사렛 사람 예수' 그는 정말 별 볼 일없는 존재였다. 예수, 그분은 그들 역사 속의 한 사람일 뿐이고 지금은 그들을 먹여살리는 훌륭한 관광 자원일 뿐이었다. 남원의 춘향이처럼.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갑자기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한 번밖에 없는 내 청춘. 다 어디로 갔나.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미치광이처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지쳐 바위 위에 벌렁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엔 별이 총총 떠있고 저 멀리 노란 달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똑똑히, 그러나 말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다정하고도 감미로운 소리가 내 온 마음과 몸·영혼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왔다. "이복아! 나는 너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저 별을, 저 달을 만들었을 것이야." 순간,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사랑으로 태어났고, 사랑 속에 사는 '나' 그 '귀한 나'를 발견하는 순간, 하늘도 땅도 물도 사람도 역사도 청춘도 삶도….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했던 모든 것, 아니 앞으로 있을 그 모든 것까지도 '내 사랑하는 님의 손길이며 선물'이 됐다. 나는 80이나, 90, 100년 한정된 삶을 살다가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영원에서 와서 영원까지 살아 존재하는 나, 그 영원의 일부를 사는 나를 본 것이다. 그것도 내 사랑하는 님의 손길 속에서.

파란 소나무숲 사이로 모여 사는 황금빛 다랑논들, 이제 여물 대로 여물어 푹 숙인 나락 모가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래 저 나락 한 톨 영글려고 저 작열하는 해는 쉬지 않고 돌았고, 저 많은 별은 밤새 반짝거렸다. 이 땅 깊은 곳에서는 수천도 불길에 쇳물이 녹아 이글거리고 있다. 내 한 끼 밥상을 마련하시고자 '님', '내 사랑하는 님'은 어제도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 은퇴? 죽음? 무슨 당치 않은 소리! 나 아 직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는데 쉬다니. 일할 것이다 쉼 없이 일할 것이다. 쉼! 사실 나에게 쉴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분의 '품' 내 사랑하는 님의 그 '품' 말고.

벅찬 마음으로 기다린다. 기대한다. 이제 곧 안기게 될 나의 님 그 님의 품은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할까? 그때, 그날 내 사랑하는 '님'의 품에 안길 그날까지 나에겐 쉼이란 없나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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