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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성지따라 발길따라

동검도 채플

by 하늘 호수 2022. 6. 21.

동검도 채플

동검도 채플

이 집에 오신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문이 있지만 언제나 열려 있는 이곳은 주인이 없는 집입니다. 굳이 주인을 찾으면 이 집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당신이 이 공간에 머무는 동안, 이 집은 당신의 집입니다.

고요와 침묵과 경건함으로 비워진 이 공간이 당신에게 기쁨과 평화로 채워지는 '영혼의 쉼터'가 되길 빕니다.

 

동검도 채플

모든 것이 낮은 목소리로 다가오는 섬

동검도는 강화도 남동쪽, 1.6km의 작고 아름다운 섬으로 바다 속을 유영하는 거북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동검도 채플은 거북의 어깨에 해당하는 곳으로, 낮은 언덕에 자리한 일곱 평의 작은 성당입니다.

키가 큰 갈대 사이, 이름 모를 철새들의 울음소리와 갈대들이 부딪는 선음(禪音)을 들으며 채플에 들어서면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과 끊없이 펼쳐진 갯벌 너머로 민족의 영산이 마니산과 초피산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지만, 동검도는 거대한 연안 생명의 보고, 갯벌에 둘러싸인 섬입니다.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낮은 산, 작은 포구, 모든 것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세상이 생기는 날부터 어김없이 하루 두 번, 밀물과 썰물이 소리 없이 들고나는 섬입니다.

저 바닷물이 사람에게 경계의 눈길을 주지 않고 드나들 듯이 동검도는 사람들에게 잊힌 섬입니다. 아직도 태고의 고요와 평화의 작은 섬입니다. 그래서 동검도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실상을 일깨워 주는 곳입니다.

 

 

 

동검도 갯벌 위에 펼쳐지는 생명과 사랑의 변주

물길을 기다리는 저 목마른 갯골 사이,  생명의 상흔을 천지에 펼쳐 놓은 동검도 연안 갯벌에서는 계절과 시각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변주곡'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신의 위대한 창조의 변주는 죽은 듯 보이는 저 검은 갯벌 속에서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운명의 노크 소리'로 베토벤 운명 교향곡이 시작되듯, 하느님은 갯벌 위에서 천둥과 벼락과 눈보라와 안개와 폭풍과 미풍으로 생명과 사랑의 노래를 연주하십니다.

그 생명과 사랑의 변주는 달과 지구의 '당김과 놓음'입니다. 그 덕분에 바닷물은 썩지 않고 지구는 생명의 행성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들숨과 날숨으로 숨을 쉬듯,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순간마다 숨을 쉬고 있습니다.

숨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당김과 놓음', '들숨과 날숨', '채움과 비움'으로써만 생명은 사랑일 수 있고, 사랑은 생명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특징은 나눔입니다. 그리고 그 나눔은 '숨'을 쉬는 데서 옵니다. 이 숨결이 온 우주에 가득하여 생명은 영원합니다. 생명의 역설적 신비를 바라보면 죽음은 생명의 한 측면입니다. 살아 있는 만물이 신에 목마르고 굶주려 있듯이 '존재론적 갈망의 땅', 동검도 갯벌에는 오늘도 변함없이 주인 없이 버려진 듯한 빈 배가 만조의 밀물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검도 성모자상

 

다시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오늘 이 순간

그렇습니다. 동검도는 '기다림의 섬'입니다. 조선시대 강화도와 한강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쪽 검문소'였던 동검도는 처음부터 목적지로 가기 위한 기항지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기항지의 이름 없는 언덕 위에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섬에서 섬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이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는 인간'도 어쩌면 하나의 작은 섬입니다.

생래적으로 외로움을 타고난 존재인 인간은 그리움으로 시간 속에 머물다 가는 여행자(Homo viator)입니다. 그러나 그냥 외로운 섬이 아니며, 외딴 섬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동검도가 섬 아닌 섬이 되었듯이 저 마른 갯벌 위에 놓인 빈 배처럼 당신도 은혜로운 생명의 밀물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동검도는 먼 여정에 든 사람(Homo viator)을 닮은 섬이고 변화 무쌍한 연안 갯벌의 풍광은 인간 내면과 삶의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작은 섬에서 큰 섬(강화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승에 초대 받은 당신도 저 먼 수평선과 지평선 너머 저 '깨달음의 언덕 너머'로 눈길을 한번 돌려 보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바로, 여기' 빈 방에 앉아서, 저 광활한 갯벌을 바라보십시오. 하늘과 바다와 산으로 이어진 저 생명의 갯벌 바다를 바라보십시오.

 

 

생명의 깨달음은 '마음의 가난'으로부터 옵니다.

빛이 없음이 '어둠'이듯, 어둠의 실체도 죽음의 실체도 없습니다. 한톨 씨앗이 죽음으로써 많은 생명을 낳듯이  '희생'은 생명의 본질인 사랑과 온전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음이 하나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깨달음은 '마음의 가난'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무엇을 간절히 원한다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그 무엇을 간절히 알기를 원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서'이며, 당신은 결국 그 무엇을 간절히 소유하고 싶다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 위해서'(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당신은 생명의 그 역설적 문빗장을 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원하는 생명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깨달음이 행복입니다. 이 생명의 깨달음이 나사렛 예수가 선포하신 참행복(마태 5,1-12)입니다.

생명은 빛입니다.(욧한 1,3-4) 생명은 기쁨의 환희에 가득 찬 빛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가득한 생명의 빛은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아름답고 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듯 생명도 영원합니다.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저 광활한 생명의 빛은 시간너머 영원으로, 공간너머 무한으로 당신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몹시 외롭고 쓸쓸하다면

당신이 지금 무척 화가 나 있다면

당신이 무언가로 인해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면

당신이 이 세상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다면

당신이 까닭 모를 불안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당신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당신이 누구에겐가 억울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다면

당신이 어떤 절박한 일로 쫓기고 있다면

당신이 죽고 싶을 만큼 큰 절망에 빠져 있다면

당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당신이 그 어떤 죄책감에 한없이 시달린다면

당신이 누군가의 피할 수 없는 오해로 마음이 괴롭다면

 

여기 빈 방에 앉아서, 저 광활한 갯벌을 바라보십시오.

하늘과 바다와 산으로 이어진 저 생명의 갯벌을 바라보십시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온전히 멈출 수 있다면

가톨릭의 선지식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만약 당신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당신은 온전히 멈출 수 없고, 더욱이 자신을 온전히 비워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고 나서 30분이 지나야 다 비워진다고합니다. 하지만 비울 수 없고 멈출 수 없다고 해서 그리 두려워할 것도 애석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무한히 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이곳에서 섬광 같은 은혜의 빛을 간절히 구한다면, 당신의 어두운 눈은 빛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눈꺼풀 하나 차이로 세상이 보이고 안 보이고 하듯이, 당신 내면의 눈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염원은 간절해야 하고 당신은 결행은 단순해야 합니다.

 

2022년 부활절에

동검도 채플 주임신부 조광호

 

 

명상의 길잡이

저 멀리 피안의 수평선으로 이어진 창밖의 십자가와 산사나무는 채플 안의 유리화(가시관)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가시 돋힌 산사나무의 꽃말이 '유일한 사랑'이듯 우리에 대한 예수의 한없는 사랑도 화려한 왕관이 아니라 고통의 가시관으로 표현됩니다.

모세의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셨듯이 희생의 고통 속에서 탄생 되는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듯 생명도 영원하고, 이 아름답고 귀한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하는 기쁨과 행복은 물론, 부활의 삶도 극락왕생의 희망도 그 누군가를 위한 당신의 작은 사랑의 희생으로부터 이루어 질 것입니다.

채플주임 조광호 신부

 

 

채플 갤러리 개관전을 맞이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도 마지막 말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가늠키 어려운 장대함.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인식의 지평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신비스럽고, 두렵고, 매혹적인 것(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a)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의 작업은 태동하고 소멸한다.(중략) '태동과 소멸'이 한 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은 초자연적 존재 앞에 나 자신이 철저한 피조물이라는 전율적 경외심을 말한다. 압도적인 신비 앞에 희망의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깊이 느끼는 좌절과 실패가 그 지점이다. 그 지점을 나는 '블로 로고스(blue logos)'라고 명명하고 생애를 걸쳐 작업을 해왔다. '푸른색'은 이 누미노제적 체험의 등가물이다.(중략)

 

루돌프 오토가 지적했듯이 '거룩한 존재 앞에 얼마나 미약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통감하는 체험'은 모두가  '푸른색'으로 표현되고 그 푸르름의 변형으로 형태 지워지는 모든 언어는 암호 같은 나의 개인적 도상(personal iconograpy)으로 표현된다.(중략) 나에게 이 푸른색과 빛은 '희망 속에 좌절'을, '상승 속에 추락'을 체험하는 장을 재현하고, '넘어설 수 없는 아득함'과 '근접할 수 없는 무한함'을 호소하는 등가물이다. 나에게 있어 유리화는 이 체험을 감성적. 미학적. 직관적으로 가장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방편이다.

 

유리는 재료 그 자체로 고유의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 신비로움은 강직한 결정과 그 투명한 명료성에서 온다.(중략) 유리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그 경계에서, '현세와 내세' 사이에서 초월적 문턱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초월과 내재의 틈새에서의 상징으로서 유리는 존재한다. 그리스도 영성의 관점이 현세를 초월하여 내세로 향한다면 유리화는 외부로 펼쳐지는 우리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역방향의 미적 순화 효과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무터뜨린다.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는 아니지만, 빛을 투과시킬 수 있는 유리는 빛의 존재성을 더 집중적으로 표상하여 우리 감성과 지성에 다가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빛은 신과 인간의 세계를 매개하는 영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빛은 인간 내면에 비치는 초월적이고 신적인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상징적 요소'(헤겔)가 된다. 이러한 유리의 명료함과 투명함으로 얻어지는 '빛과  색채의 예술'이 바로 '유리화'이다.(중략) 절대 순수의 상징으로서의 하느님, 어쩌면 인격마저 여윈 신성, 저 너머의 벌거벗은 하느님. 나의 유리화 작업은 그 초월적 신성 앞에 말로써 언표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빛나는 갈증의 표현이다. 신 안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신을 찾아 헤매고 배고파 굶주린 내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보내는 존재론적 갈망의 암호이다.

 

2022년 동검도 채플에서 조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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