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 된지도 열흘이 되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사람들은 각자 한 해의 소망을 새롭게 기원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새로운 소망을 기원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보다 새로워지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과 불가능한 일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로, 쉽지 않은 일을 불가능한 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새로워지지도 못합니다.
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사람은 가끔 과거에 갇혀 살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거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도 없고, 과거의 삶도 나의 삶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너무 과거에 매여 있다 보면, 때로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삶에 매여 사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죄가 그 원인일 때가 많습니다.
지나간 죄를 떨쳐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면서, 그 과거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지나간 죄에 갇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나간 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과연 나의 삶과 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 속에 죄를 허락하셨다면,
나는 나의 삶 속에서 그 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축일입니다.
'세례'하면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지나간 나의 모든 죄가 씻겨 진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과 세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의 상징적인 예표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가 지니는 풍부한 의미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는,
오늘 복음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대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축성하시고,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 말의 뜻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르단 강은 어떤 곳입니까?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마지막 장애물로 나타났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널 때처럼, 발에 물도 적시지 않고 그 강을 건넌 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요르단 강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며 횡단했던 그 강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경이로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요르단 강에서 건져온 돌, 열두 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기념해서 여호수아서 4,21-23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훗날 너희 후손들이 이돌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발도 적시지 않고 건넌 일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어라.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우리 앞에서 홍해를 말리시어 우리가 모두 건너도록 해주시지 않았느냐? 그것처럼, 우리 앞에서 요르단 강물도 말리시어 우리를 건너게 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마지막으로 장애물로 나타났던 곳이자,
그 장애물이 재거된 장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장애물로 나타난 것이 요르단 강이었고, 또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의 은총을 마지막으로 체험했던 곳, 또한 요르단 강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의 장소로 요르단 강이 선택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이란, 또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란,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는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르단 강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마지막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마지막 장소였던 것처럼,
우리의 죄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죄는 그런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총을 맛보고, 구원을 맛보려면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은총속에 있다고 자부하고, 구원을 자신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같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례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변화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새로워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나 세례의 은총은 모두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례에 대한 다른 한 가지 면을 더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은 세례를 받을 때 지나간 죄를 다 사함을 받고 깨끗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얼마나 믿고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여러분은 이 교리를 얼마나 믿었고, 지금 또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하느님께 이렇게 묻는 듯이 보입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의 죄를 씻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저의 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데, 그 죄를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저의 죄를 다 알고 나시면, 저에 대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너의 지나간 모든 죄를 사해주시겠다'는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의 죄에 대해 잘 모르시기에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느님께 말씀드릴 때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답을 주실 것입니다.
"나는 네가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너의 죄를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알고 있는 죄뿐 아니라,
네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 네가 죄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너의 그 모든 죄까지도 알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죄를 없애주겠다는 것은,
'네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란다.
나는 오히려 네가 "다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새롭게 태어나고 싶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하고
나에게 청하기를 바란단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너의 죄가 가볍다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죄는, 어떤 죄이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이고, 네가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한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나는 네 자신보다도 더 네가 일어서기를 바라는 너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지난 날, 나에게 '하느님! 제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나는 네가 일어서고자만 한다면, 한 번이 아니라 10번, 100번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란다.
나는 네가 이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하고 수없이 말해 주었지만,
너는 나의 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단다."
"주저앉지 마라. 죄책감에 쌓여 주저앉는 것이, 죄를 지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나를 더 실망시키는 것이란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라. 그리고 새롭게 시작해라. 그것이 너에게 바라는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아끼시는 하느님!' '나보다 나의 죄 때문에 더 마음 아파하시고, 그리고 내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그분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 죄 사함의 세례를 받았다면, 요르단강은 그 씻겨진 죄 때문에 얼마나 더러워져 있겠습니까?
그래도 요르단 강은 자신이 더러워지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르단 강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요르단 강을 죄에 찌든 더러운 곳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대로 요르단 강은 정말 더러운 강이겠습니까?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자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요르단 강을 묵묵히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 강을 더럽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요르단 강에 서 계신 모습을 여러분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죄가 씻겨져 나간 그 강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서 계신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앞에 서 계신 것은, 요르단 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요르단 강은, 그 강에서 세례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이 전해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자마자 곧 복음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요르단 강 앞에서 서 계신 것은, 어쩌면 요르단 강이, 자신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또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싶어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에 서 계신 이유는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주시기 위해, 복음 선포를 위한 그 힘든 고난의 길을 향해,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진리란,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은총도 그만큼 커져갔고,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지은 죄가 하느님의 사랑을 덮을 수는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싶어서 그 힘든 십자가의 길까지 가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읽고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의 <완성하지 못한 주일 강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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