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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해외 여행

이태리 일주 - 로마 ( 예수회 성당,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 성 아녜스성당, 끌레멘스 성당)

by 하늘 호수 2014. 5. 17.

 

1.

예수회 본산인  제수 성당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IHS 는 희랍어( IHSOUS)로 '예수'의 약자로 예수회의 로고이다.

 

천장의 프레스코화

 

바로크 화가 바치차의 그린  '예수 이름으로 거둔 승리'

조각처럼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 3D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바라볼 수록 놀랍다.

 

천장 아래에는 거울이 있어 프레스코화를 비추고 있는데,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그림이 크고 입체적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손을 모셔두었다.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 주의 하비에르 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 통일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한 뒤 파리 생트 바르브 대학에서 공부하고, 1530년에 철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거기서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예수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1534년에 초창기 회원 6명과 함께 파리 근교의 몽마르트르에서 첫 서원을 하였고,

영신생활을 체험한 뒤 1537년에 동료들과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540년에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와 극동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의 활동지역은 인도와 스리랑카, 말레이 반도에 있는 말라카와 몰루카 제도 그리고 일본 등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그는 일본에 온 최초의 신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또한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특히 나병환자들에게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

 

중국선교를 결심하고 중국 내지로 진출하려던 그는 병을 얻어 1552년 중국 광동 근처의 상치안 섬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인도의 고아에 안장되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라고 부르는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개종시킨 이만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

인도와 일본의 사도'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그를 시성하였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축일은 12월 3일.

 

(인터넷에서 수집해 온 자료)

 

 

 

 

 

 

 

 

 

 

 

2.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은 영원한 도시, 로마 대주교의 본부이며 로마의 4대 성당 중 하나이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과 성 바울로 대성당과 같이 코스탄티노 황제시대에 건립되었다.

1305년 교황의 아비뇽 유수 때까지 교황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당 정면은 5개의 대형 아치가 장엄하며 중앙아치 양측에는 각각 두개의 반원 기둥이 받들고 있다.

다섯 개의 대형 아치는 성당의 다섯 개 문과 일치하며 성당 내부 역시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오른 쪽 제일 끝에 있는 문이 거룩한 문(희년의 문)이다.

이 문은 바티칸의 오랜 전통에 따라 25년마다 있는 희년에만 열린다.

 

방문하는 신자들이 성모님의 새끼 손가락과 아기 예수님의 발을 잡고 기도를 하곤 해서

그 부분이 반짝이며 돋보인다.

 

 

 

 

축일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Dedication of Saint John Lateran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라테라노에 대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따르면 12세기부터, 바로 오늘(11월 9일) 이 기념 행사를 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이 축일을 지냈는데,

나중에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인 이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기록한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서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 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 안에서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참된 성전입니다.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서기까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였던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요 로마의 주교좌 성당(Catedrale)이기도 하다.

성당은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해 공인되자 교황 멜키아데가 교회를 일으키고

또한 교황들의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근처의 병영과 풀라우지 라테라노(평민 가문으로서 집정관을 지냈으며 이 일대의 소유지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기증함)의 소유지인 이곳을 기증했다.

 

<라테란 성당>이라는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이다.

처음 성당은 구세주인 그리스도에게 헌정되었으나 여러번 손상을 입어 오다가 896년에는 드디어 지진으로 붕괴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 905년에 다시 개축을 본 성당은 이후로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의 두 성자에게 바쳐지는데

특기할 것은 이곳에서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1235-1303. 재위 1294-1303)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성년의 선포를 보게 된 것이다.

 

1307년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간 후로 성당은 거의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고 1308년과 1360년에는 또다시 화재까지 입는 비운을 당한다.

그러다가 교황 인노센트 10세(Innocent X, 재위 1644-1655) 때 1650년의 성년 행사를 앞두고 그 준비로 보르미니에게 개축을 명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의 성당 정면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인데 꼭대기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과 교회 박사들의 상이 서있고

내부의 현관 왼쪽에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대리석 상이 모셔져 있다.

 

길이가 130미터나 되는 내부는 그리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대신 장엄, 엄숙한 맛을 전해주고 있다.

 중앙 제단은 특히 <교황의 제단>이라 불려 지는데 여기에는 성 베드로가 예배를 보던 테이블이 보관되어 있다.

때문에 이 제단에서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단 바로 위 천개에는 은을 입힌 성 베드로(오른쪽)와 성 바오로(왼쪽)의 흉상이 모셔져 있고 제단 밑에는 교황 마르티노 7세의 무덤이 있다.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 벽으로는 알렉산드로 알가르디의 작품이 부조되어 있는데 내용은 신약성서(오른쪽)와 구약성서(왼쪽)의 일화들이다.

이 위에는 다시 선지자들의 초상이 있고 그 밑의 벽감들 속에는 장엄한 규모를 띤 열 두 사도들의 대리석상이 들어 있는데

이는 건축가이며 조각가인 보르미니의 설계에 의한 것이다.

 

성당의 후진(Abside)을 압도하고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화는 야고보 또리티와 야고보 다 까메리노의 작품으로 1288년과 129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리스도교의 신자 생활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매우 깊다.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와 성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

 

 

 

 

 

 

 

 3.

성 아녜스 성당

 

나보나 광장의 서쪽 중앙에 바로크 양식의 성 아녜스 (Sant' Agnese) 성당이 있다.

 

성녀 아녜스의 무덤이 있는 성당으로 봉사자님께서 특별히 인도해주신 성당이다.

세례명이 아녜스인 나에겐 의미있는 성당

 

"성녀 아녜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아녜스

 

성녀 아녜스의 이름은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결백한 정을 주었는지 모른다.

특별히 젊은 여성들에게는 천상의 말씀처럼 들렸을것이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그녀의 신앙의 견고함과 굳센 덕행에 대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노나 성 암브로시오와 같은 위대한 교회의 박사들까지도

자신들의 저서에 그녀를 칭찬할 정도였다.  

 

그녀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것은, 모두 역사상으로 확실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중에는 사람들이 상상해서 아름답게 꾸민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 순교자가 그 당시나 후세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었던가를 증명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녀 아녜스의 양친은 가문도 유명한 로마 귀족이었고,

다같이 열심한 교회 신자였으므로, 아녜스에게도 세심한 주의로써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조금도 세상의 허물에 물들지 않고,

마치 백합화와 같이 자란, 그 당시 상류계급에 유행된 사치와 향락을 보고서는,

오히려 격렬한 증오감을 가질 뿐이었고,

자신은 평생 동정을 지티며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굳게 맹세했던 것이다.

 

아녜스가 만 13세에 달했을 때, 일찍이도 청혼이 들어왔다.

상대자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 시장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녜스는 본래 용모가 단정해, 일찍부터 로마 사람들에게 알려진 미모의 소녀였고,

게다가 가문은 유명한 귀족이었으므로 그의 청혼도 하등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그녀는 이미 하느님께 바친 몸이어서 배필로서는 예수 외에 다른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만 나는 이미 남편이라는 이가 결정되어 있습니다"하며 처음주터 거절해 버렸다.

 

시장 측에서는 그녀의 말을 의심해 여러모로 조사한 결과, 아녜스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시장은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녀를 법정에 소환해 얌전히 교를 배반하고 자기 며느리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며 형벌을 받고 불에 타서 죽을 것인가 하고 위협했다.

아직 어린 소녀라 그와 같이 위협하면 틀림없이 굴복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의외에도 아녜스는 조금도 겁내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배교한다는 표시로 우상 앞에 향을 피우라고 했을 때,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처름 손에 향을 들고서 우상앞에 있는 불에다 십자가 표시를 했다.

그녀의 신앙의 견고함에는 시장도 놀랄 뿐이었다.

 

최초의 실패에 화가 난 시장은, 이번에는 그녀를 악마들의 소굴(魔窟)에 보내어 정조(貞操)를 빼앗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번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잠시 묵상을 하고 나서 시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 몸을 손상시키고 피를 흘리게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 몸은 예수게 봉헌한 것이므로 이를 더럽히지는 절대로 못할 것입니다."

 

그후 다시 그녀는 신뢰에 충만한 눈동자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예수 그리스도여, 반드시 나를 보호해 주소서"라고 울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후 아녜스는 시장의 말대로 마굴에 끌려가 더러운 사람들 앞에 앉게 되었으나,

세상 사람이 아닌 선인(仙人)과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누구 하나 가까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아주 강하고 무모한 자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할 찰나, 허공을 붙잡고 기절해 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대단히 놀라며, 무서워했다고 한다.

 

계획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을 본 시장은 크게 분노하여,

이번에는 그녀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불속에 던졌지만,

그때도 맹렬한 화염은 좌우로 갈라져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여러 번 하느님의 기묘한 보호로 신변의 위험을 모면한 그녀는,

결국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나갔다.

꽃과 같은 어린 처녀의 사형을 불쌍히 여긴 구경꾼들은,

사형장 주위를 둘러쌌고 누구를 막론하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모양을 보고는,

저절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 슬퍼하지도 안히고 오히려 명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녜스 혼자 뿐이었다.

그녀의 목을 자를 형리도 너무나 가련해서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는

 "빨리 당신의 책임을 완수하십시오. 어서 사람의 눈을 끄는 이 몸을 잘라 주십시오"라고 재촉하며, 온순히 눈과 같이 흰 목을 내밀어,

휘두른 형리의 칼날에 아직 꽃봉오리와 같은 생명을 하느님께 바쳐 순교했던 것이다.

 

 

성녀 아녜스의 상본에는 그녀가 한 마리 어린양을 안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성녀가 순교한 후, 슬픔에 젖어 있는 양친을 위로하기 위해 그러한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다.

 

성녀 아녜스의 무덤 위에는 현재 아주 아름다운 성전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 수녀들은

매년 두 마리의 어린양을 키워 그 털을 로마 교황에게 바치는데, 대주교에게 보내는 팔리움은 이 털로 만든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4.

끌레멘스 성당

 

로마에 왔으니 미사를 참례해야 한다며

봉사자님께서 특별히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셔서

이 성당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성당 외부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소박해 보이는 작은 성당인데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 없다.

온통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양쪽으로 의자가 놓인 작은 공간에서

오후 5시 평일 미사에 참례했다.

할머니 신자들이 먼저 오셔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고

그분들이 독서도 하였다.

 

신자가 얼마 참석하지 않은 성당에 두 분의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셨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전례는 익숙한지라

거룩한 미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음이 주님의 은총이고 축복이다.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감사한 마음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느님, 이런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끌레멘스 성당 내부모습은

다른 분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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