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 글/- 묵상 글

운명에 대하여

by 하늘 호수 2014. 10. 19.

 

 

 

 

 

운명에 대하여

 

오늘도 마리아 씨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마리아씨는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어김없이 저에게 그 글을 보내줍니다. 밥솥에서 막 뜸이 든 밥을 금방 퍼서 밥그릇에 담아낸 거처럼 김이 솔솔 나는 글입니다. 글쓰기는 마리아 씨의 유일한 취미인데, 언제부턴가 저는 마리아 씨의 글을 가장 먼저 읽는 애독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씨가 보내준 글을 읽으면 잔잔한 호수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분의 마음속에 흐르는 풍경이 비치는 듯합니다. 외로움이 담겨있지만 감미로움이 있고, 아픔이 담겨있지만 희열이 느껴집니다. 마리아 씨가 쓴 글에는 그가 살아온 삶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마리아 씨가 가진 학벌과 외모를 보아 한때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세상 보란 듯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직장을 잡고 멋진 연애를 하고 마침내 남부럽지 않은 배우자를 만나 창창한 미래를 꿈꾸며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은 그가 마음먹은 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첫아이를 얻은 기쁨도 잠시 그 아이는 자폐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그 얼마 후 불의의 사고로 남편마저 읽게 되면서 이제는 세상 한가운데 오로지 자신과 평생 보살펴 주어야 하는 아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나무망치를 세 번 두드리면 법정에 선 피고의 운명이 결정된다지요. 마리아 씨는 운명의 법정에서 평생을 아들에게 갇혀 살아야 하는 인생, 무기징역을 땅땅땅 선고 받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어느 날 뜻하지도 않게 운명이라는 법정에 끌려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생의 굴레를 쓰게 된 겁니다. 그리고 참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는 굴레가 있습니다. 생로병사는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시간과 환경이 그렇습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태어날 장소도 환경도 시간도 나의 의지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런 가족을 만났는지, 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는지, 왜 이런 사회와 시대를 살아야만 하는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운명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삶이 척박하고 힘겨울수록 이런 질문은 깊어져서 때로는 슬픔에 빠지고 원망과 분노마저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불완전과 결핍을 살아야 하고, 그래서 저마다 운명이라는 굴레를 쓴 채 생을 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야 할 이런 운명을 기꺼이 수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에서는 이것을 '제 십자가'라고 일컫습니다.

 

이 십자가는 자신이 지고 거기에 매달려 죽어야 하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예수님마저도 피땀을 흘리며 피하고 싶어하셨던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운명은 성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불완전한 피조성이 극복되고 완전성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우리 운명의 굴레 안에도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소망이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 씨가 이번에 보내온 글은 여고 시절 친하게 지내던 동창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외로움과 못내 아쉬운 어떤 그리움이 짙게 느껴졌습니다. 친구들이 각자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대학교수로, 의사로, 사업가의 아내로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는 동안 마리아 씨는 그 대열에서 떨어져서 매일매일 아이 하나에 오롯이 매달려 살아야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 외로움과 그리움에는 잔잔한 평화가 있고 인생의 어떤 깊이가 담겨있었습니다.

 

어느 시인이 '모든 사람은 자기 운명의 건축가'라고 했다지요. 피하고 싶은 운명 안에 진정 건설해야 할 자신만의 '참된 인생'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게 보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소위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이 진정 우리가 부러워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애인 아들 하나 부둥켜 안고 평생을 살아온 마리아 씨는 운 나쁘게 슬픈 인생을 산 불행하기만 한 사람일까요? 그런데 진정 인생의 깊은 의미를 살아낸 사람은 누구일까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빛을 보고 슬픔의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외로울 때면 아들이 친구가 되고, 기도할 때는 아들이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마리아 씨. 그가 회피하지 않고 살아낸 운명의 굴레는 그와 아들이 건설한 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답할 수 없었던 인생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도 우리가 안고 사는 운명의 굴레, 그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리아 씨의 메일을 받고 저는 이러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짧은 답장을 보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어머니들을 바라볼 때마다 성모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분들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지만, 받아들인 십자가로 더 깊은 인생을 얻었지요. 마리아 씨도 그 중 한분이십니다!"

 

- 바오로 딸 출판, 전원 신부의 영성 편지 <그래, 사는 거다> 중에서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