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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성지따라 발길따라

황경한 묘소와 눈물의 십자가 - 추자도 - 제주교구

by 하늘 호수 2022. 4. 24.

눈물의 십자가
추자도 황경한 묘소

 

추자도 황경한 묘소

위치 : 제주시 추자면 하추자도 예초리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제주 관노로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 부부의 아들인 황경한이 묻혀 있는 곳이다. 제주지 추자면 하추자도 예초리 남쪽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다.

황사영은 1775년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세속적 명예를 버리고 천주교 신앙에 투신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충북 베론에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썼다. 이 백서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되고, 대역 죄인으로 처형당하였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 관노로, 그리고 두 살 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773년 남인이요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두 살 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어린 아들 경한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섬사람들이 거두어 줄 것을 바라면서 떠났다. 대정현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그래서 노비의 신분이면서도 '서울 할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38년 선종하여 현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갯바위에 놓여진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성장하여 살다가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황경한 묘소를 뒤로 하고 눈물의 십자가를 향하여 걷는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다시 깔딱고개를 올라야 눈물의 십자가에 다다른다

 

깔딱고개를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면 황색바위가 있고 그곳에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눈물의 십자가 곁에 아기 황경한이 바위 위에 놓여져 있다.

갓난아들을 놓고 가는 정난주 마리아의 아픔을 생각하니 내 가슴도 미어져 온다.

 

눈물의 십자가

가로 3m, 높이 5.5m의 십자가는 정난주 마리아의 눈물이 십자가에 맺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표현했고,

두 살 난 아기 황경한을 형상화한 조형물은 묵주를 손에 쥐고 누워서 두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황경한이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걸었던 예초리 포구, 기정길, 추석산길, 신대산 정망대에서 우리는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황경한의 애절한 삶을 만나게 된다.

 

갯바위에 놓여진 아기 황경한
눈물의 십자가

황경한 바위와 십자가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며 바다로 돌출된 물생이 바위 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된 경한이 놓여져 울던 바위이다. 제주로 귀향 가던 정난주는 이 바위에 어린 아들을 내려놓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 안은 채 떠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2016년 10을 구덕에 놓인 아기 황경한 상과 십자가가 설치되었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어부 오씨가 발견하였고, 옷고름에 쓰여진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였다. 이리하여 황경한은 오씨 집에서 성장하였다. 그 집터가 조그마한 포구 마을인 하추자도 예초리에 있다. 경한의 후손들에 따르면 황경한이 성장했던 집은 그 후 불타버리고 집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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