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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글/- 묵상 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2010년) 강론 2

by 하늘 호수 2011. 7. 2.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용서는 사랑인데 다만 힘든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어서, 쉬운 사랑이 있고, 힘든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은 쉬운 사랑이고,

내가 사랑하기 어렵다고 단정 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든 사랑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내가 사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힘든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힘든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어렵지만 또 힘에 겹지만, 그 힘든 사랑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읽은 글에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용서는 내 스스로 고뇌하면서, 고뇌하는 상대방을 사랑으로 받아줄 때 가능합니다.

용서는 사랑과 위로를 찾는 서로에게, 다리를 놓는 작업입니다.

 

거센 폭풍이 불 때, 다른 새들은 처마 밑에 숨지만, 독수리는 강한 양 날개로 비행을 즐깁니다.

그처럼 사람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게 하는 양 날개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은 없습니다.

용서해 보려고 노력하면, 더 용서가 힘듭니다.

용서는 '용서하려는 자기 자신'까지 포기해야 이루어집니다.

 

힘들 때마다 근처의 공동묘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힘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용서가 힘들 때면 무덤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산 이에게는 용서가 어렵지만, 죽은 이에게는 용서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신감이 넘치고 힘이 넘칠 때, 그때, 그런 자신의 눈으로만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용서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 누워있는 내 자신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용서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배반할 제자들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는

배반한 제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려 생을 포기하거나, 괴로움에 시달리다 지쳐, 삶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시는 용서였습니다.

'그냥 용서하고 말겠어."라고 하는, 단순히 일회성으로 그치는 용서가 아니라,

나를 배반한 사람들의 앞날까지도 걱정하시는 용서였습니다.

 

 

 

- 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의 <완성하지 못한 주일 강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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