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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해외 여행

이태리 일주 - 시에나

by 하늘 호수 2014. 4. 24.

 

 

중세도시 시에나

 

시에나는 '활활 타오르는 붉음' 보다는 수줍은 새색시 볼의 발그레함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역사의 흔적으로 빛바랜 붉은 도시이다.

카타리나 성녀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이탈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해서 배꼽이라는 뜻의 움벨리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에나파로 불리우는 회화파로 인해 미술계에서도 유명한 곳으로 많은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피렌체에 가려졌지만 중세 후기의 건물들이 복원되면서 건축이 가장 잘 된 토스카나의 한 지역이다.

 

 

 

 

 

 

 

 

 

 

 

 

 

 

 

 

 

 

 

 

캄포광장

도시미학으로 완벽히 설계된 캄포광장은 푸블리코 궁이 이루는 조화미가 뛰어나다.

붉은 색의 열린 조개 모양을 한 캄포광장은 

가이아 분수에서 시작해 푸블리코 궁을 향해 미끄어지듯 서서히 낮아지면서 마치 포옹하며 감싸는 듯 하다.

이탈리아의 많은 광장중에서 단연 최고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광장으로,

시에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부채꼴 모양의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는 시에나의 전통 경마 경기인 팔리오가 매년 7월2일과 8월16일에 개최된다.

팔리오 경기는 노련한 기수가 말을 몰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캄포광장을 세번 돈다.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팔리오 경기는 1분 갓 넘는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되지만 팔리오를 준비하는 기간은 일년간 계속된다.

모든 시민이 열정적으로 참가하는 팔리오 기간 동안 시에나는 다른 어느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환상적인 중세기의 축제 분위기에 물든다.

 

 

푸블리코 궁전

13세기 말에 시작해 14세기 중반에 완성된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이 탑의 높이는 102m이며 두오모 성당의 종탑과 같은 높이로 세워졌다.

이는 종교의 권위와 민중의 권위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500여개의 계단을 올라 시에나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가이아 분수의 조각들

 

 

 

푸블리코 궁 내부 입구

 

 

 

 

 

 

 

 

 

시에나의 두오모 성당

1200년 말기 조반니 피사노에게 12세기에 건립된 구 성당을 크게 증축하고 새로 단장하는 공사를 위임했으나

원래 계획의 일부만 실현할 수 있었다.

 

프랑스 고딕 성당의 영향을 받아 세 개의 아치 정무 위에 뾰족한 삼각 장식이 있다.

 

두오모 성당의 내부는 세개 본당으로 구분되며

바닥은 여러 유명 예술가들의 솜씨가 보이는 대리석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의 무덤이 있는 성당

 

 

대단한 활동가이면서도 깊은 관상가였고 또 자신의 신비 체험을 통해 당시 정치권과 교회 장상들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가타리나.

그녀는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들을 자신 안에 흡수, 통합적 지식과 영성을 형성했으며 이를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성녀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에게 주입된 지혜입니다.

 말하자면 이 지혜는 알기 쉽고 깊이가 있으며 천상적 진리에 관해 도취시키는 열정이자 신구약 성서 안에 담겨진 신앙의 신비를 말합니다.

이러한 동화는 분명히 가장 특이한 자연적 선물들로 인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또한 신비적인 은사 곧 성령으로부터 나온 지혜의 은사에 기인한 의심의 여지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 가타리나 성녀의 교회박사 선언 강론)

가타리나 성녀의 본명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erina Benincasa).

1347년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에서 염색업을 하는 베닌카사 가문의 25명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는 천성적으로 생기발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6살 때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 체험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예수님이 교화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빛의 바다에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은 수많은 성인 성녀들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고

그중에서 가타리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요한 사도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7살 때 봉헌 결심

7살 때 이미 자신의 온 일생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이후

안전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려는 집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16세가 되던 해에는 만텔라테회(Mantellate, 도미니코 제3회로 이들은 수도복을 입고 가정에서 살면서

도미니코회 지도하에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에 입회했으며 18살 때부터 3년 동안 독방에서 오로지 기도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글 읽기를 터득한 것도 이 시기에 이뤄졌는데 20세가 되면서 그리스도와 ‘신비적 약혼식’을 가졌던 가타리나는

‘교회 쇄신에 기여하라’는 깨달음을 얻고 만텔라테회 회원들과 함께 토스카나 지역은 물론 이탈리아 전역,

 나아가 고국을 벗어나서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병자간호와 특히 죄인들 개종에 힘썼던 가타리나는 흑사병 같은 전염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벗이 되어주었다.

이는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고 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 가타리나의 행동은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모략과 박해를 받기에 이르는데

이로써 도미니코회 총회 석상에 출두, 신앙을 검토당하기 까지 했다.

가타리나는 1376년 아비뇽의 그레고리오 11세를 찾아가 교황에게 대항하고 있는 피렌체인들과 화해하도록 간청,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계속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개혁에 기여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분열된 교황권과 교회 통일을 위해 매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했다.

이외에도 하느님과의 대화와 기도, 교회 각계각층 사람들을 위한 기도 바치기와 편지 보내기 등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기록한 저서 ‘대화’ 외에도 약 400통의 편지를 남긴 가타리나는

1380년 4월 29일 ‘주여,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

“어머니가 자신의 젖으로 아이를 먹이듯 기도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으로 우리를 먹여 기른다.”

가타리나는 기도에 있어 우리 자신의 방법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어 맡겨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분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기도를 ‘예수님의 발에 매달리는 단계’,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르는 단계’, ‘예수님과 입맞추는 단계’로 구분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섭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1416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던 가타리나는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다.

 

 

 

 

 

 

 

 

 

 

 

 

 

 

 

 

 

 

 

시장이 열렸다.

못 보던 야채도 구경하고

과일이 고프던 참에 과일을 보니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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