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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해외 여행

이태리 일주 - 아씨시

by 하늘 호수 2014. 5. 2.

 

중세도시 - 아씨시

 

 

 

시에나에서 아씨시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새파란 풀로 뒤덮인 언덕 위

고풍스런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 향해 쭉 뻗은 나무들이 볼만한 전경을 만들어 준다.

 

 

 

 

여긴 포도밭인 것 같다.

 

아직 나무가 우거지기 전이라

빈나무 사이로 집이 보인다.

 

드디어, 저 높은 곳

중세의 도시,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아씨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무 사이로 종탑도 보이고

 

 

이 성문을 통과하면 중세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키아라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키아라 성당

아씨시의 특산인 흰색과 핑크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줄무늬의 아름다운 외벽인 인상적인 성당

성당 안에는 성녀 클라라가 누워있단다.

내부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움...

 

 

키아라 성당 마당에서 보이는 풍경들

 

 

 

빼곡히 지어진 중세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 된 성벽에서 자라는 식물도 보이고...

 

 

 

프란치스코 성인 태어나신 곳

 

 

10월 4일

우리 사부 세라핌적 성 프란치스코,부제, 세 수도회의 창설자, 대축일

 

1181(l182?)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모여와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클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성인으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복음적 생활양식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성인이 시작한 수도생활의 이 새로운 형태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교회에 가져왔고,

당시 교회의 교계제도를 거부하면서가지 성행하던 청빈운동에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관상하던 중 주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그리스도 처럼되었다.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유해는 성 프란치스코.대성전에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성수대

 

 

곳곳이 성당이다

 

 

 

 

 

 

 

 

 

 

 

아씨시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꽃과 새와 자연과 더불어 주님을 찬미하던 모습들이 상상된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 - 류해욱신부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저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저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

두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저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자연과의 일치를 통해

주님을 찬미하고 있으며 성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히 프란치스코 영성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자주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에 매료되어 이 찬가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라는 이냐시오 영성은

바로 이 자연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말씀의 집에서(류해욱신부) http://www.sogang.ac.kr/~hwsj/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더니

이제야 해가 나고 파아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St. Francis in Ecstasy-CARAVAGGIO.

c.1595. Oil on canvas,92,5 x 128,4 cm.Wadsworth Atheneum, Hartford, Connecticut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의 자존심 따위도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시시의 부요했던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1182-1226년)는

그의 어머니 비카 부인이 요한으로 세례(9월 26일 성루피노성당에서 세례자요한으로)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사랑하던 부친이 프랑스인이란 뜻으로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시대는 화폐 경제체제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귀족과 시민자치단체가 대립하고 전쟁과 사회 변혁의 시대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프란치스코는 명랑한 성격으로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던 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된 후로는 오랜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회복한 이후로 점차 딴 사람으로 변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가난한 이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 중에 들은 것에 완전히 복종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프란치스코야,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스폴레토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성다미아노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나병환자와의 극적인 입맞춤을 통하여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후 그는 성 다미아노에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보속 생활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1205년말,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해에,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성당과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포르치운쿨라)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1206년 4월, 그는 자기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208년 2월 24일, 포르치운쿨라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복음말씀(마태오 10,9-10)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했으며,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 교외 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극도의 가난을 살았고,움막에서 살았으며,

일을 하고 애긍을 청했으며,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며,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에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 2회 "가난한 부인회" 일명 ’글라라회’를 창설하였으며

글라라는 가난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이니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모슬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에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 했으나,포로가 된 사실이 있으며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 초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 성지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1215년 11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도미니코성인을 만났을 것으로 본다.

이때 호노리오3세로 부터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허락받았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오직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가난했던 것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 철저한 고행을 했다.

그는 말년에 ’형제인 육신’에게 사과했다.

 

 

 

 

그의 가난은 겸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이 겸손은 그가 선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마음의 길잡이이며

예수의 애덕에서 요약되고 성체 성사에서 완전히 표현되는 복음적 생활을 사는 것이었다.

 

1220년 총회에서 프란치스꼬는 장상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이것 또한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 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1223년11월 29일 승인을 받았다

회칙을 인준받은 뒤, 그레치오에서 구유를 꾸며 성탄절 밤을 성대하게 지냈고,이를 계기로

성탄절에 구유를 꾸미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입었으니,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다.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셨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원하셨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 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성인의 일생을 그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것이다.

성인께서는 오상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 되었다.

 

 

1304년 베네딕토 11세가 오상축일을 제정하였으며,

9월 17일에 프란치스코 오상축일을 기념하고있다.(게시판1369번참조)

비교적 짧았던(그는 44세에 세상을 떠남) 그의 말년에는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리고 최초의 3회 회칙인 "생활지침"을 인준받았으며

시에나의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가 재속형제회의 첫회원이 되었다.

지금도 성인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성인이 세운 재속 프란치스꼬회원도 다른 재속회원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어,

그분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한다.

 

 

1224년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으신후 고통 중에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움막에 거처하면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임종’자매인 죽음’을 맞을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1226년 10월 2일 최후의 만찬을 재현했다.

10월 3일 해질 무렵에, 맨바닥에 누워 시편 142편을 불러주기를 형제들에게 청했다.

죽음의 순간에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주도록 청하였다.

 

성인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서를 곁에 두고자 했고,

우리에게 "나의 아들인 여러분,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당신들께 작별을 고하니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시오.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며 당신들 모두를 그분의 사랑에 맡깁니다."라고 축복하여 주었다.

 

10월 4일 장례행렬이 아시시로 향하였고 다미아노성당에 잠시들러 글라라와 다른 자매들이 마지막으로

볼수있게 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처음 그가 다녔고 글라라가 처음 성인의 설교를 들었던 성 지오르지오성당

(현재 성글라라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230년 5월 25일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제단아래로 옮겨졌다.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성인은 우리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이 불타올랐기에

그분에게는 오직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이같은 열정이 오상을 받게 하었고,이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완전히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적 형제애의 실현을 위해 형제적 순종,가난,작음의 덕성등,

성인께서 삶으로 증거해 주신 영성을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이 영성을 구현 시키기 위해 각자의 삶의 처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노력해야한다.

 

1939년 성 프란치스코는 이태리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당안에 설치된 거대한 성수대

 

성당 내부를 돌아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곳곳이 화려하고, 많은 경당들이 마련되어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곳이었다.

 

 

 

 

 

 

 

 

 

 

 

 

 

태양의 노래 -최민순신부 역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2)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4)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5)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6)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7)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8)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9)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10)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11)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12)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13)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14)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성당 측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광장이다

 

 

 

수사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계시는 걸까?

 

 

 

 



오, 감미로와라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나를 평화의 도구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유혹있는 곳에 믿음을

 

나를 평화의 도구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 있는 곳에 기쁨을

 

오 주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나를 평화의 도구로

용서함으로 용서를 받고

자신을 줌으로써 받으며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 얻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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