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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나의 묵상

김대건 신부님 관련 책을 읽다

by 하늘 호수 2015. 9. 16.

 

 

 

 

1.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면

신부님들께서는 강론시간에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편지글 일부를 읽어 주시곤 한다.

 

그때마다 편지원문을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는데

절두산성지 성물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2집과 제3집>을 발견하고는

너무 반가워 얼른 집어 들어 사 왔다.

 

두 권의 책을 읽다보니 김 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1권을 아무리 찾아도 구할 수가 없어

대신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번역하시고 바오로딸에서 출판한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라는 책을 대신 가져왔다.

 

앞의 두 권의 책은 당시 중국과 마카오에 계시던 신부님들이 쓰신 편지 중에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이 있는 편지글을 번역한 것이고

세 번째 책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손수 쓰신 편지 모음그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다.

누구의 추측이나, 상상에 의한 소설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이라는 것이다.

 

세권의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초기 가톨릭 교회의 시작과

신자들의 순교를 어느 정도 알수가 있었고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어서 기뻤다.

많은 궁금증이 풀리기도 했다.

 

한국의 초기 교회는 신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선교사 없이 신자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들었다.

유교가 만연하던 시대에 학자들이 책을 읽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성령의 강한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는 9월을 순교자성월로 지내고 있는데

순교자성월을 맞이하여

순교자에 대한 책을 읽게 되어 보람으로 느껴진다.

 

 

                     ***

 

 

2.

홍유한이라는 철학자는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적 사물의 이치로 스스로 깨닫고

가톨릭 교회의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였으며,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처럼 하느님을 공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주교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라서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옛 전통을 따라 일곱째 날을 다른 날보다는 공경할 만한 날이라고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

 

그 이후로

 

               :

 

이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도착하거든 예수회원이라는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서

천주교라는 종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자 북경의 주교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북경을 떠나올 때 가톨릭 교회의 서적과 성물을 조선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1784년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 김대건 신부님께서 쓰신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3.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내포 즉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솔뫼에서 순교 성인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5년 11월 22일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사제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3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최양업, 최방제 프란치스코, 김대건은 서울에 도착하여 라틴어를 배웠다.

 

1836년 12월 3일 3명의 신학생은 서울을 출발하여 28일에 변문에 도착하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이후 마카오와 필리핀 마닐라, 만주, 소팔가자를 오가며 학업을 계속하였고

1844년 12월 15일에 고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비롯하여 부제품을 받았다.

그들은 아직 만 24세가 안 되어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였다가

3월에 고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작은 어선을 타고 다시 조선을 떠나 상해로 갔다.

 

고 주교는 상해에서 1845년 8월 17일에 만 24세가 된 김대건 부제를 사제로 서품하였다.

그리고 고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배를 타고 상해를 떠나

1845년 10월에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한다.(강경, 나바위)

 

김대건 신부는 안타깝게도 1846년 5월 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 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57년 9월 23일 가경자로 선언

1925년 7월 5일 시복

1949년 11월 15일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된

1984년 5월 6일 시성

 

-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중에서 발췌 -

 

 

           ***

 

 

4.

김대건 신부님은

몸이 많이 병약하셨지만

정신은 참으로 담대하셨던 분이다.

 

너무나 짧은 사제 생활을 마치고 순교하셨지만

그 정신과 신앙은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의 가슴속에 깃들여 있다.

 

그러고 보니

9월16일 오늘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날이다.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셨다니

오늘 새남터성지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맞질 않아서 안타깝다.

머지 않은 날에 새남터성지 순례를 다녀오기로 하며...

 

 

 

               ***

 

5.

김대건 신부님의 스물한 번째 편지

옥중에서 1846년 8월말 조선신자들에게 쓰셨다.

다른 편지는 다 라틴어와 한문으로 쓰셨지만 유일하게 한글로 쓰셨다.

 

 

 

 

김대건 신부님의 스물한 번째 편지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염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宗徒)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患難)을 당하니, 우리 한몸이 되어 애통지심(哀痛之心)이 없으며 육정(肉情)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主命) 아니면 주상주벌(主賞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라.

 

할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의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원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상은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 신부 사정 정표

 

 

 

 

6.

한국교회의 박해

1784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백여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를 계속 받아서 순교자만도 만 명이 넘는다.

그 중 두드러진 박해는 다음과 같다.

 

1785년 (정조 9년)  을사박해 때 김범우가 귀양가서 순교하였다.

1791년 (정조 15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순교하였다.

1795년 (정조 19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등이 순교하였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대박해 때 오가작통법으로 주문모 신부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15년 (순조 15년) 을해박해 때 경상도에서 3백여 명의 신자가 검거되고 백여 명이 수감되었다.

1827년 (순조 27년) 정해박해 때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2백40여 명이 체포되고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1839년 (헌종 5년)  기해대박해 때 제2대 조성 대목구장인 앵베르 범 주교와 모방 나 신부 및 샤스탕 정 신부를 비롯하여

                          두 신학생의 아버지와 정하상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46년 (헌종 12년) 병오대박해 때 김대건 신부, 현석문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0년 (철종 11년) 경신박해가 일어났다. 그해에 예비자만 천명이 넘었는데 이 박해로 복음화 사업이 큰 지장을 받았다.

1866년 (고종 3년)  병인대박해는 대원군에 의하여 6년 동안 계속된 가장 참혹한 박해였다.

1876년 (고종 13년) 조선과 일본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원군 시대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조선왕국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1886년 (고종 23년) 조선과 프랑스가 조약을 맺음으로써 천주교가 공식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901년 (광무 5년)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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