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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이야기/- 나의 묵상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 최양업 신부의 편지 모음집

by 하늘 호수 2015. 9. 20.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동갑이요 동기동창입니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은 그 동안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님의 그늘에 가려져

우리 한국 신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사뭇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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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조선 8도 중 5개 도에 산재해 있는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셨기에...

해마다 7천리씩 걷지 않으면 안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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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는 1821년 3월 1일에 충청도 홍주 즉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에서

순교 성인 아버지 최경환 또는 영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5년 11월 22일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사제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나 조선말을 배우기도 전에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나 신부는 3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에,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3월 14일에, 김대건은 7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라틴어를 배웠다.

1836년 12월 3일에 3명의 신학생은 서울을 출발하여 28일에 변문에 도착하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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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12월 15일 이전에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 과정을 모두 끝내고

고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비롯하여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아직 24세가 못 되어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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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1월 20일 경 조선 입국을 시도 했다가 실패하였다.

1846년 12월 말에도 조선 입국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1847년 1월부터 7월까지 홍콩에 머무는 동안에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847년 7월과 1848년 초와 1849년에도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로 신부는 해로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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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부제는 상해에서 1849년 4월15일 사백주일에

중국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타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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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12월에 최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또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예측했던 대로 메스트로 신부의 입국은 불가능하였으나

최양업 신부는 다행히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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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는 1845년 귀국길에 오른 지 실로 5년여 만에야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지루하고 초조하고 짜증나는 여행중에 최신부의 영성이 어떠한 것이었는가가

 그의 편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한마디로 깊은 겸손이었다.

실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주님 안에서 항상 바라고 의지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그러한 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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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에는 최 신부의 관할 구역에서만 예비자가 1천 명이 넘어,

복음화 사업이 절정에 달했다.

그때에 공교롭게도 1859년 12월부터 1860년 8월까지 경신 박해가 일어났다.

1861년 조선 대목구 신자 총수는 18,03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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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신부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그의 관할 구역은 5개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 해도 127개나 되어 1년간 7천여 리를 두루 다녀야 했다.

그는 그처럼 엄청난 공소 순회 외에도 교우들을 위해 책을 저술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신자들의 일과기도서, 즉 천주성교공과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과

천주교 교리를 문답 형식으로 편찬한 성교요리문답을 재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주요한 교리를 4.4조의 가사로 지어서 보급시켰다.

이것이 천주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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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신부는 1861년 6월에 사목 활동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가던 길에 겹친 과로로 말미암아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리하여 발병한 지 보름 만인 6월 15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베르뇌 장 주교의 집전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시신은 배론성지에 매장되었다.

 

장 주교는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다블뤼 안 부주교도 "최 신부의 뛰어난 덕행, 지칠 줄 모르는 열성, 두드러진 재능과 재질,

무슨 일이든지 해내는 능력 등으로 미루어 현재로서는 그의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였다.

 

 

- 정진석 옮김, 바오로딸 출판 <최양업 신부의 편지 모음집- 너는 추추 놓고 나는 세우고> 중에서 발췌 -

 

 

 

 

 

김대건 신부님 관련 편지글을 읽고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글이었다.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글을 읽고 있노라니

초기 신자들의 일화

때로는 웃음이 나기고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오기가 여러번이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산골로 찾아드는 양반도 있고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집을 나와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

 

성사 받기를 고대하며 몇년을 참아 기다려야 하는 신자들이었다.

세례성사도, 고해성사도, 성체성사도...

 

자유로이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신자들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초기 교회 신자분들...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던들

과연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인가...

 

앞으로 당분간 최양업 신부님과 김대건 신부님의 글에 나타나있는

초기교회 신자들의 이야기 글을 발췌해서 올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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